[만물상] 커피믹스
1990년대 동구권에서 사업하던 한인 교포가 카자흐스탄의 거래처를 방문했다. 정성 들여 준비한 선물을 내놨는데 반응이 시큰둥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다음에 올 때는 커피믹스를 부탁한다”고 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커피”라는 거였다. 커피를 자본주의 퇴폐 문화의 상징으로 배격하는 북한도 뒤로는 커피를 즐긴다. 특히 커피믹스는 외교관이나 외화벌이 일꾼 귀국 가방에 들어가는 필수품이다. 고위층에 바치는 선물 목록에도 들어 있다.
▶커피믹스의 원조 격인 인스턴트 커피는 미국 남북전쟁 당시 북군이 술 대신 지급하기 시작한 보급품에서 비롯됐다. 처음엔 액상 커피에 연유를 섞어 응고시켰다. 1차 대전 이후 열건조 커피와 냉동동결 제품이 차례로 등장했다. 그러나 막대형 봉지에 커피·크림·설탕을 넣을 생각은 못했다. 그 아이디어를 낸 주인공이 한국의 동서식품이었다. 1976년부터 개발에 들어가 1980년 첫선을 보였다. 1993년엔 기호에 따라 설탕 분량을 조절할 수 있는 제품을 선보였다. 2007년 통계청 조사에서 ‘한국을 빛낸 발명품 10선’ 중 5위에 올랐다. 커피믹스의 성공을 본 글로벌 식품기업 네슬레도 모방 제품으로 시장에 뛰어들었다.
▶히트상품의 특징 중 하나가 생산자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소비되는 것이다. 한때 수험생들 사이에 ‘붕붕 드링크’라는 카페인 음료 제조법이 성행했다. 박카스·원비디·레모나를 섞어 마시면 온몸이 날아갈 것 같은 활력을 느낀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그래도 잠이 쏟아지면 커피믹스를 추가했다. ‘붕붕드링크 하이퍼 포션’이라 한다. 몸에 좋을 수는 없지만 워낙 널리 소비되다 보니 나타난 활용법이다.
▶또 다른 효용 가치가 추가됐다. 경북 봉화의 광산 매몰 사고에서 9일 만에 극적으로 구조된 이들이 “커피믹스를 밥처럼 먹으며 버텼다”고 했다. 커피믹스 대표상품인 ‘맥심 모카골드 마일드’ 1개 열량이 50㎉다. 탄수화물 9g 중 당류 6g, 포화지방 1.6g 등이 들어 있다. 다른 회사들 제품도 비슷하다. 성인 남성의 하루 칼로리 섭취량 2000㎉엔 크게 못 미치지만 위급 상황에서 목숨을 지켜준 훌륭한 비상식량이었다.
▶재난 전문가들은 비상식량의 조건으로 ‘조리하지 않고 먹을 수 있고’ ‘포만감 없어도 높은 열량을 지녀야 하며’ ‘장기 보관이 가능하고’ ‘휴대가 편리하도록 부피가 작고 가벼워야 한다’는 점을 꼽는다. 건빵이나 미군 전투식량인 MRE가 해당한다. 여기에 한국인이 만든 커피믹스도 포함돼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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