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322. 조선을 스쳐간 근대화의 기회: 1883년 보빙사와 민영익①

bindol 2022. 11. 16. 15:43

함께 신세계를 봤으되, 너무나도 달랐던 그들 [박종인의 땅의 歷史]

322. 조선을 스쳐간 근대화의 기회: 1883년 보빙사와 민영익①

입력 2022.11.16 03:00
 
1883년 미국으로 떠난 보빙사(報聘使) 일행. 윗줄 왼쪽부터 무관 현흥택, 최경석, 수행원 유길준, 역관 고영철, 수행원 변수. 아랫줄은 왼쪽부터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과 미국인 고문관 퍼시벌 로웰. 보빙사는 구체제를 유지하고 서구 기술을 도입하려는 동도서기(東道西器)형 근대화 작업이었다. 이 가운데 현흥택은 민비 암살사건을 목격한 뒤 고종을 경복궁에서 빼내려는 춘생문 사건에 개입했다. 최경석은 미국으로부터 근대 농법을 도입해 뚝섬 일원에서 농장을 시험하다가 요절했다. 유길준은 미국에 남아 공부를 계속했다. 고영철은 지방관을 두루 역임했다. 변수는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가 미국으로 망명해 ‘미국대학 졸업 조선인 1호’가 됐다. 기차 사고로 죽었다. 홍영식과 서광범은 갑신정변을 주도했다. 정변 실패로 홍영식은 거리에서 처형됐고 서광범은 망명을 떠났다. 수구파로 변신한 민영익은 갑신정변 때 정변파에 의해 난자당했다가 살아나 훗날 중국 상해에서 죽었다. 조선의 운명을 결정지은 사람들이었다./미국의회도서관
 

* 유튜브 https://youtu.be/19_4tlrBCEI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근대화라는 폭풍우 그리고 기회

19세기 후반은 지구 곳곳에 근대화라는 폭풍이 몰아치던 시기였다. 과학혁명(16세기)과 시민혁명(17~18세기)에 이어 산업혁명(18~19세기 초)이라는 세 가지 대전환을 이뤄낸 유럽이 순식간에 아시아를 압도하던 때였다. 아시아에서는 서구화가 곧 근대화라는 등식을 받아들인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국가로 변신하던 중이었다.

청나라와 조선 또한 근대화 폭풍 속 생존 방법을 모색한다. 청나라는 양무운동(洋務運動)이라는 서구 문물 도입 작업에 착수했다. 옛 체제는 그대로 두고 서구 기술을 도입해 개혁을 이루겠다는 ‘동도서기(東道西器)’식 개혁작업이었다. 조선 또한 일본(1876)에 이어 미국(1882)과 수교하고 서구 문물 도입을 통한 개혁 작업에 들어갔다. 이 또한 구체제를 유지하는 동도서기 근대화였다.

그 가운데 핵심 작업이 바로 1883년 미국으로 떠난 ‘보빙사(報聘使)’다. 조미수호 이후 미국에서는 조선에 공사관을 개설했고 조선은 상설공사관 대신 사신을 파견했다. 문을 닫고 살던 조선 왕국에 500년 만에 굴러온 기회였다. 그 기회를 잡은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좌절과 변신 이야기.

태평양으로 떠난 그들

1883년 5월 19일 주조선 미국 공사 푸트(Foote)가 조선에 부임했다. 신분은 특명전권공사, 그러니까 영사나 총영사보다 높은 지위였다. 조선을 끝까지 ‘속방(屬邦)’으로 묶어두려는 청나라를 견제하고 미국이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한다는 사실을 과시한 신분이었다. 서울 정동 현 미대사관저 부지에 공사관을 개설한 푸트는 사절단 파견을 조선 정부에 제의했다. 7월 9일 조선 정부는 이를 수용해 사절단장인 전권대신에 민영익(関泳翊), 부대신에 홍영식(洪英植), 종사관에 서광범(徐光範)을 임명했다.(1883년 음6월 5일, 6일 ‘승정원일기’)

속속 임명된 사절단원은 이러했다. 수행원 유길준(俞吉濬)과 변수(邊燧), 무관 최경석(崔景錫)과 현흥택(玄興澤), 역관 고영철(高永喆). 그리고 중국어 통역관 오례당(吳禮堂), 미국인 고문 퍼시벌 로웰(Lowell)과 로웰의 일본어 통역관 미야오카 쓰네지로(宮岡恒次郞). 그리고 미국 현지에서는 조선과 일본 체류 경험이 있는 미해군 소위 조지 포크(Foulk)가 안내를 맡았다.

7월 16일 이들은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도를 공격했던 미 해군 함정 모노카시(Monocacy)호를 타고 제물포에서 일본 요코하마로 떠났다. 그리고 한 달 뒤인 8월 15일 이들은 2년 전 영국 리버풀에서 진수한 증기 여객선 아라빅(Arabic)호로 갈아타고 동쪽 망망대해 태평양을 향해 출발했다. 500년 동안 숨어 살던 조선인이, 태평양을 건너는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1883년 9월 29일자 주간지 ‘레슬리 일러스트’ 표지(왼쪽). 9월 18일 보빙사 일행이 당시 미국 대통령 아서를 예방하면서 복도에서 조선식 큰절을 올리는 장면을 그렸다. 보빙사 일행은 문으로 들어가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정사 민영익이 인사말과 고종 친서를 읽었다. 함께 절을 한 사람은 민영익(정사), 홍영식(부사), 서광범(종사관)으로 추정된다. 이들의 운명은 이듬해 극적으로 달라진다./미국의회도서관

미국 도착부터 귀국까지

1883년 9월 2일 500년 먹은 나라에서 온 사절단이 독립한 지 100년이 갓 넘은 나라, 아메리카에 도착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이들은 대륙 횡단 열차를 타고 시카고~워싱턴을 거쳐 일행은 9월 17일 뉴욕 5번가 호텔(The Fifth Avenue Hotel)에 여장을 풀었다. 다음 날 이 호텔 대접견실에서 당시 미국 대통령 아서(Arthur)를 만났다. 화려한 비단 관복을 입은 일행은 접견실 복도에서 조선식 큰절로 예를 표한 뒤 방으로 들어가 다시 한번 절을 했다.(1883년 9월 29일 ‘레슬리 일러스트’지) 국서 제정 의례가 이어지고 이후 이들은 보스턴을 위시한 동부 산업단지와 뉴욕 공장, 신문사, 육군사관학교, 우체국을 견학했다. 유길준이 “악마(devil)의 힘으로 불이 켜진다고 생각했던” 전깃불도 그때 처음 목격했다.(1883년 10월 15일 ‘뉴욕타임스’. 김원모, ‘개화기 한미교섭관계사’, 단국대출판부, 2003, p528 재인용) 홍영식은 우체국에, 최경석은 농장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해 말 부사 홍영식을 포함한 1진이 먼저 귀국하고 1884년 6월 2일 정사 민영익 일행이 귀국했다. 먼저 귀국한 홍영식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지러울 정도로 눈부신 빛 속에 있었다.”(1884년 12월 17일 ‘푸트 공사가 프렐링휘센 국무장관에게 보낸 편지에 동봉된 포크 소위의 편지’, 미 국무성 Office of The Historian 자료)

이듬해 귀국한 2진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암흑세계에서 태어나 광명세계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제 다시 암흑세계로 돌아왔다.”(1884년 6월 17일 ‘푸트 공사가 프렐링휘센 국무장관에게 보낸 편지’) 이 말을 한 사람이 다름 아닌 정사 민영익이었다. 왕비 민씨 친족으로 실세 가운데 실세. 그 실세가 광명 속에서 발견한 충격. 두 가지가 결합하면 이제 조선의 개화와 근대화는 시간 문제였다.

 
보빙사 일행이 아서 대통령을 만났던 뉴욕 5번가호텔(The Fifth Avenue Hotel). /뉴욕시립도서관

귀국한 그들, 엇갈린 운명

수행원 유길준은 정사 민영익이 배려해 상투를 자르고 미국에 남아서 공부했다. 국비 유학생으로는 조선인 1호였다.

무관 현흥택은 대한제국 군대 해산 때까지 무관으로 일했다. 1895년 10월 왕비 민씨 암살 사건 때 현흥택은 경복궁에서 왕실 친위 부대인 시위대 연대장으로 근무하며 중상을 입었다. 이 을미사변을 계기로 현흥택은 근왕파로 변신했다. 11월 28일 벌어진 춘생문 사건에도 간여했다. 춘생문 사건은 미국인 선교사, 친러·친미 관료와 군인들이 을미사변으로 공포에 싸인 고종을 경복궁 외부로 빼내려던 사건이다.(1895년 11월 15일 ‘고종실록’)

무관 최경석은 미국 보스턴에서 여러 농장을 견학한 뒤 미국 농무부로부터 각종 신품종 종자와 농기술 서적을 선물받았다. 1883년 1진으로 귀국한 최경석은 정부로부터 망우리 일대에 광대한 토지를 농지로 허가받고 농무목축시험장을 설치했다. 시험장에서는 재래종과 도입종을 비교해서 재배하며 근대 농법을 연구했다.(‘신편한국사’38, 개화와 수구의 갈등, ‘농무목축시험장과 농무학당’) 미국에 연장 체류 중이던 민영익은 각종 근대 농기구를 수입해 시험장에 보냈다. 1885년에는 소와 말 같은 가축도 미국 품종이 제물포를 통해 시험장에 수입됐다. 암말 2필, 종마 1필, 젖소 2필, 황소 1필과 돼지, 양이 포함돼 있었다. 그런데 1886년 의욕 넘치던 농장 관리자 최경석이 갑자기 죽었다. 이후 농장은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무관심 속에 폐쇄됐다.(김원모, ‘견미 조선보빙사 수원 최경석, 오례당, 로우엘 연구’, 동양학 27집, 건국대동양학연구소, 1997)

역관 고영철은 이후 외국어와 상관없는 지방 군수직을 다수 맡으며 살았다. 대대로 역관 집안인 고영철에게는 형제가 셋 더 있었는데 모두 역관이었다. 그 가운데 둘째형 고영희는 1882년 임오군란 때 하나부사 요시모토 일본공사와 연을 맺었다. 이후 승승장구한 고영희는 1910년 탁지부대신으로 한일병합조약 체결에 앞장섰다.

부사 홍영식은 귀국 이듬해 우정총판(郵征總辦)에 임명됐다.(1884년 음3월 27일 ‘고종실록’) 그리고 그해 12월 본인이 주관한 우정국 개원 기념 파티에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종사관이었던 서광범도 가세했다. 수행원 변수도 가담했다.

갑신정변은 외부로는 대청(對淸) 사대 청산과 자주, 내부로는 전제 왕권을 제한하는 입헌군주제가 목표였다. 그때까지 고종 정권이 추진하던 ‘동도서기’식 근대화, 그러니까 옛 체제에 대한 개혁 없이 서구 기술만 도입하겠다는 근대화는 무용지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미 홍영식은 1883년 보빙사로 떠날 때 도쿄에 한 달 체류하면서 김옥균과 만나 정치 개혁을 논한 적이 있었다. 그때 김옥균은 차관 문제로 일본에 체류 중이었고, 홍영식은 정사 민영익 눈을 피해 김옥균과 거사를 계획했던 것이다.(‘유길준전서’5, 일조각, 1971, pp. 264~265. 정용화, ‘문명의 정치사상’, 문학과지성사, 2004, p76 재인용)

정변은 실패로 돌아가고 홍영식은 무당 진령군이 살던 북묘까지 고종을 수행했다가 그곳에서 살해됐다. 가문은 풍비박산 나고 집 또한 피칠갑이 된 채 흉가로 남았다. 훗날 고종의 정치고문이 된 미국 선교사 호러스 알렌이 고종 윤허 속에 그 집에 광혜원이라는 병원을 설립했다.

서광범은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훗날 귀국해 갑오개혁정부 대신이 됐다. 이어지는 파행 정국 속에 서광범은 주미특명전권공사로 다시 미국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죽었다. 수행원 변수는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해 메릴랜드대 농과대에 입학했다. 1891년 변수는 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그해 모교 앞에서 열차사고로 죽었다. 모교에는 그를 기리는 ‘변수 룸’이 있다.

개혁의 키맨, 민영익의 변신

‘구체제 타도’라는 정변 목적을 달성하려면 구체제 실세 누군가가 죽어야 했다. 그 누군가가 다름 아닌 민영익이었다. 정변 기획자들은 민영익을 우정국 개원 잔치에 초대한 뒤 칼로 난자했다. 사망 위기까지 갔던 민영익을 대수술로 살려준 사람이 미국 선교사 겸 의사 알렌이었다. 광혜원은 이 왕비 민씨 조카를 살려준 데 대한 보답이었다.

누구는 훗날 근왕파로 변신했고 누구는 급진 쿠데타를 일으켰다. 누구는 민생을 위한 농업 혁신을 준비하다가 황망히 죽었다. 그리고 민영익, 그 모든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권력의 소유자는 이렇게 처단의 대상이 돼 버렸다. 어쩌면 조선 망국의 흐름을 바꿀 수도 있었던 그들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다음 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