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 조선을 스쳐간 근대화 기회③/끝 민영익의 변절과 갑신정변
* 유튜브 https://youtu.be/uYG9Ip1c4oA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줄거리: 1884년 5월 세계일주를 마치고 귀국한 보빙사 정사 민영익은 “광명세계로 들어갔다가 다시 암흑세계로 돌아간다”고 했다. 하지만 그를 수행한 미 해군 소위 포크에 따르면 민영익은 세계일주 내내 공자와 맹자 서적을 읽으며 문명세계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귀국하던 날 서광범은 “민영익은 반(反)근대화로 간다”고 예언했다. 예언은 피바람 속에 실현됐다. 1884년 12월 4일 밤 서울 우정국 낙성식에서 보빙사 부사였던 홍영식과 그 무리들은 정사였던 민영익을 장검으로 난자했다. 갑신정변이다.>
홍영식과 민영익, 분열의 징조
공식 방미 일정을 마친 보빙사 일행은 1883년 11월 두 팀으로 나뉘어 부사 홍영식 일행이 먼저 귀국하고 이듬해 5월 정사 민영익과 종사관 서광범, 수행원 변수가 세계 일주 후 귀국했다. 미국 대통령 아서는 전원에게 해군 함정과 편의를 제공했지만 3명만 이를 수용했다. 왜 이들은 함께 움직이지 않았을까.
전(前) 대한제국 탁지부 주사 윤효정이 쓴 ‘풍운한말비사’(1946)에는 이런 기록이 나온다.
갑신정변 후 민영익 사촌형 민영소와 이규환, 지석영 등이 대화를 나누다가 누군가가 “홍영식이 죽어서 참 아쉽다”라고 했다. 그러자 민영소가 이렇게 반박했다. “내가 민영익한테 들었는데, 홍영식은 참으로 도량이 좁은 사람이다. 미국에서 민영익이 모피 옷을 고종에게 주려고 고르고 있는데 홍영식이 ‘왕실 인척이 그따위 상납 폐습을 못 벗다니!’하며 면박을 줘서 사지 않았다고 하더라. 그런데 귀국해서 민영익이 궁궐에 들어가니 고종이 바로 그 옷을 입고서 ‘홍영식이 선물했다’고 자랑하면서 ‘너는 이런 진귀한 선물 없느냐’하고 묻더라는 것이다. 그때 홍영식 인간성을 다시 봤다고 한다.”(윤효정, ‘대한제국아 망해라(’풍운한말비사’)’, 다산초당, 2010, pp70~72)
민영익 사촌이 전한 말이니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서로에 대한 불신이 존재했던 사실은 추정이 가능하다. 그리고 홍영식과 민영익은 ‘워싱턴 체류 중 민영익이 사대를 고집하는 데 대해 홍영식은 독립 자주를 역설한 결과 정견의 충돌을 보았고, 마침내 동서로 길을 나눠 고국에 돌아오니 오래지 않아 홍영식은 독립당 중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되었다.’(민태원, ‘김옥균 전기’, 을유문화사, 1969, p73)
왕실 실세가 사신단 정사(正使)로 떠나는 전근대적 시스템에 따라 젊은 여흥 민씨 실세 민영익은 보빙사 단장이 됐다. 한계는 명확했다. 권력은 고종·민씨 척족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었다. 그 권력을 분산시키고 구체제를 엎겠다는 서구적 근대화는 민영익 개인은 물론 ‘진영적으로’ 수용 불가능한 미래였다.
누란(累卵), 계란이 쌓이다
징조는 현실로 변했다. 임오군란(1882) 이후 청나라에 의해 청나라식 근대화를 시도하던 고종 정권은 민영익 귀국과 함께 본격적인 청나라식 개혁에 착수했다. 봉건체제를 그대로 두고 서구식 기술을 도입하는 ‘동도서기(東道西器)’형 개혁이다. ‘환장(換腸)’, 막부를 갈아엎고 창자까지 갈아끼우는 일본 메이지유신과 질적으로 다른 길이었다.
1884년 음력 5월 2일 민영익은 귀국 보고를 하기도 전에 이조참판에 임명됐다. 인사권을 장악한 것이다. 7월 2일 민영익은 수도방위사령부 격인 금위영 대장에 임명된 데 이어 8월 26일 새로 개편된 고종 친위부대 친군영 우영사(사령관)에 임명됐다. 개화파가 이좌녕(李左侫, 왼쪽 아첨꾼)이라 부르는 이조연이 좌영사에, 윤우호(尹右狐, 오른쪽 여우)라고 부르는 윤태준이 후영사에 임명됐고 또 다른 수구파 한규직이 전영사에 임명됐다.(1884년 음8월 26일 ‘고종실록’, 1883년 11월 2일 ‘윤치호일기’) 우영사가 된 민영익은 이틀 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협판, 10월 2일 기기국 총판에 겸직 임명됐다. 바야흐로 군부 실세요 청나라식 근대화를 추진하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핵심이며 청나라식 무기를 제조하는 기기국 핵심이 되었다. 미국공사관 무관으로 부임한 조지 포크는 이렇게 기록했다. ‘1884년 9월 민영익은 개화파와 완전히 절연했다. 때로는 면전에서 서양인을 경멸하는 오만함을 보이기도 했다. 8월에는 한 고위 관리가 청나라 병사들에게 집단구타를 당하기도 했다.’(1884년 12월 17일 ‘푸트 공사가 프렐링휘센 국무장관에게 보낸 편지에 동봉된 포크 소위의 편지’, 미 국무부 Office of The Historian 자료 No.128) 실현돼 가는 서광범의 예언에 개화파는 몸서리를 쳤다. 차곡차곡 쌓아올린 계란더미처럼, 개화파 붕괴는 시간문제였다.
다가오는 위기, 무르익은 기회
1년 반 전 제물포를 떠난 보빙사들이 일본에 도착했을 때 홍영식은 차관 교섭을 위해 일본에 와 있던 김옥균과 “군사 양성과 외국군 철군을 이루고 5년 뒤 거사하자”고 약속했다.(‘유길준전서’ 5권, 서조충정공(書趙忠定公), 일조각, 1971, pp. 263~265. 김종학,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 서울대 박사논문, 2015, 재인용)
그런데 보빙사가 출발하기 석 달 전인 1883년 4월 한성판윤으로 활동하던 박영효가 광주유수로 좌천됐다.(1883년 음3월 17일 ‘고종실록’) 박영효는 광주 남한산성에서 일본식 군사 500명으로 ‘교련소’ 부대를 양성하다가 그해 11월 6일 유수직에서 해임됐다.(같은 해 음10월 7일 ‘승정원일기’) 교련소는 즉각 친군영 전영에 강제 배속됐다. 애써 만든 군사력을 수구파에 송두리째 빼앗긴 것이다. ‘민비의 한마디에 나는 파면되고 양성했던 군병은 수구파 영솔하에 돌아가고 말았다.’(박영효, 1926년 6월 ‘신민’ 14, ‘갑신정변’. 국사편찬위, ‘신편한국사’ 갑신정변, 재인용)
쿠데타에 필요한 무력이 급속도로 축소되는 와중에 청불전쟁이 터졌다. 1884년 8월 5일 오랜 영토 분쟁 끝에 프랑스 극동함대가 대만 기륭포대를 포격한 것이다. 이보다 석 달 전인 5월 청나라는 개전을 대비해 조선 주둔 병력 3000명 가운데 1500명을 봉천성(奉天城)으로 이동시켰다. 무력 개화 쿠데타를 진압할 군사력이 절반으로 감축됐다는 뜻이었다.
수구파가 던져놓은 위기감과 지옥문과 청불전쟁이 열어준 기회. “5년 뒤에”라고 일본에서 김옥균과 홍영식이 다짐했던 거사 시기는 자연스럽게 앞당겨졌다. 그리하여 1884년 양력 12월 4일, 운명의 겨울밤이 도래했다.
지옥의 파티
미국에서 본 바대로, 보빙사 부사 출신 홍영식은 1884년 4월 우정총국 설립을 고종으로부터 윤허받고 책임자인 우정 총판에 임명됐다.(1884년 음3월 27일 ‘고종실록’) 11월 19일 홍영식이 미국공사 푸트에게 말했다. “빛을 가리는 물건은 깨뜨려서 사방을 밝혀야 한다.”(1884년 11월 19일 ‘윤치호일기’) 파천황(破天荒)의 밤이 왔다.
1884년 12월 4일 서울 종로 우정국에서 낙성 기념 파티가 열렸다. 실내에 마련된 연회석에는 여러 외국 공사와 통역, 조선 정부 세무사 묄렌도르프가 초청됐다. 홍영식과 김옥균, 박영효가 개화파로 참석했고 수구파로는 한규직과 민영익, 이조연이 참석했다. 이 세 사람이 바로 고종 친위대인 친군영 전-좌-우 영사, 바로 수구파 군사력을 장악한 군부 실세들이었다. 윤치호가 ‘여우’라고 비난했던 후영사 윤태준 또한 초청됐지만 마침 궁궐 당직이라 불참했다. 궁궐 동향 파악은 보빙사 수행원 변수가 담당했다. 종사관이었던 서광범은 우정국 바깥에서 대기했다.(김옥균, ‘갑신일록’ 1884년 12월 4일) 수구파에 징발당했던 광주 교습소 병력 일부가 쿠데타에 가담했다. 김옥균이 일본 도야마학교에서 길렀던 사관들은 ‘무슨 일이 닥치든 책임을 이행할 결심’으로 가담했다.(서재필, ‘회고 갑신정변’: ‘갑신정변 회고록’, 신복룡 등 역, 건국대출판부, 2006, p235)
안국동 민가 방화를 신호로 거사가 시작됐다. 개화파는 ‘물고기가 강이나 바다로 들어가듯 새가 제 보금자리를 찾아가듯, 같은 성(姓) 가진 자들이 바글대는 쪽에 붙어버린’ 민영익을 칼로 난자했다.(서재필, 앞 책, p237) 그 겨울밤 우정국 주변은 피바다로 변했다. 그날 밤 고종을 찾아 창덕궁으로 간 정변 주도자들은 우정국에서 도주한 전영사 한규직과 좌영사 이조연, 뒤늦게 입궐한 후영사 윤태준을 고종이 보는 앞에서 죽였다. 일찌감치 수구파로 전향한 내시 유재현도 이들에 의해 살해됐다.(1884년 음10월 18일 ‘고종실록’)
위기감에 쫓기고 기회에 대한 긍정적 확증편향 속에 실행한 쿠데타였다. 혁명은 실패했다. 개화파는 모두 죽었고, 산 자는 망명했다. 개화는 물거품이 됐다. 실세 민영익은 구사일생했다. 민영익은 고위직을 두루 섭렵한 뒤 을사조약(1905) 직후 중국으로 갔다. 1910년 나라가 망했다. 1914년 민영익이 상해에서 죽었다. 그 어느 언저리에서 아쉬운 순간이 잠깐 조선을 스쳐갔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러나 조선 사절 민영익은 피라미드에 오르지 않았다[박종인의 땅의 歷史] (0) | 2022.12.09 |
---|---|
322. 조선을 스쳐간 근대화의 기회: 1883년 보빙사와 민영익① (0) | 2022.11.16 |
321. 백성을 무시하고 권력만 좇았던 오군(汚君) 인조 (0) | 2022.11.16 |
320. 이씨 왕실 족보 왜곡과 1537년 경회루에서 벌어진 막장 사대(事大) 대참사 (0) | 2022.11.16 |
고종, 왕비릉 이장을 위해 조말생 묘를 강제로 옮기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0) | 2022.10.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