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앞 못보는 마라토너

bindol 2022. 11. 17. 05:45

[이규태 코너] 앞 못보는 마라토너

 

조선일보
입력 2002.11.05 20:22
 
 
 
 


앞 못 보는 30대 여인이 엊그제 세계적 선수들이 겨루는 뉴욕 마라톤에서
풀코스를 5위로 골인하여 세상을 감동시키고 있다. 11세에 앞을 못 보게
된 말라 러년은 앞사람이 뛰는 발 소리만을 듣고 암흑이 주는 인간
한계를 극복해낸 것이다. 88서울올림픽이 있기 직전 로스앤젤레스
마라톤에서 두 다리를 절단당한 베트남 참전 용사 위랜드가 두 손만으로
경쟁자도 없는 고독한 경주를 3일 계속한 끝에 심판도 없는 가운데
골인을 하여 온 세계를 울렸던 이래의 감동이다.

베트남전쟁 중 퀴논 육군병원에서 다리를 절단당한 미군 병사가 두 발을
자른 도마뱀을 머리맡 유리상자 속에 기르고 있는 것을 본 기억이 난다.
다리 없다는 것이 살아가는 데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 도마뱀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설득시키고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 병사가
로스앤젤레스 마라톤의 위랜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확인해
보지는 못했다. 다만 다리가 없고 앞을 못 본다는 것이 인생에 그다지 큰
결격이 못된다는 웅변이다.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헬렌 켈러가 나이애가라 폭포에 들렀을 때 그
감동을 흥분하여 말한 적이 있었다. 그 장관을 보지도, 또 그 웅장한
폭음을 듣지도 못하면서 감동한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자 '폭포가
낙하하는 벼랑에 서서 공기가 진동하고 대지가 동요하는 것을 피부로
느꼈을 때의 격렬한 감동을 가눌 수 없어 몸이 뒤틀렸다' 했다.
나이애가라의 임장감(臨場感)을 이처럼 절실하게 나타낸 어떤 시인이
있었던가 싶어진다. 장애란 치명적인 불행이 아니라 인간 속 깊이 내재해
있는 가능성에 접근하는 길인 것이다. '뭣보다 두려운 적은 불구가
아니라 스스로의 체념인 것이다. 자신이 이런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그만한 인간밖에 되지 않는다'는 헬렌 켈러의 말이 새삼스럽기만 하다.

먹고 입고 사는 데 풍족해져 신(神)까지 저버리고 이기적 독존(獨尊)으로
치닫고 있는 미국 청소년들에게 살아있는 인간교재로서 러년과 위랜드가
전국 순회교육을 하고 있다던데, 약간의 곤경·불편·불만을 못 참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한국 청소년과 좌절을 겪고 있는 분들에게 산다는
것이 남들과의 경쟁이 아니라 나와의 경쟁임을 웅변해주는 앞 못 보는
여자 마라토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