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어느 核가족의 경사
2009년 4월 27일 북한 TV를 보던 정보 당국자들이 눈을 의심했다. 김정일의 원산농업대학 시찰 소식을 전하는 뉴스에서 ‘놀라운’ 사진이 방송을 탔다. 나머지 32장엔 김정일이 등장했는데 이 사진에만 그가 없었다. 대신 젊은 남녀 3명과 노인이 서 있었다. 김정일의 세 자녀 정철·정은·여정이 김기남 선전비서와 찍은 사진이었다. 그로부터 1년 5개월 뒤 김정은이 공식 등장했다.
▶”조선인민군에게 영광 있으라.” 1992년 4월 25일 김정일의 열병식 연설로 외부에 공개된 유일한 육성이다. 김정일의 비밀주의·신비주의는 강박에 가까웠다. 후계자로 내정된 게 1974년인데 1980년 공식 등장 때까지 ‘당중앙’이란 별칭으로만 불렸다. 가족사 노출도 극도로 꺼렸다. 출생지, 출생연도, 이름까지 조작해 쌓아올린 우상화의 공든 탑이 무너지는 걸 두려워했다. 처조카 이한영이 탈북해 김씨 왕조 치부를 자꾸 드러내자 암살조를 남파해 살해했다.
▶김정은은 다른 스타일이다. 육성 신년사를 비롯해 공개 연설을 자주 한다. 농구광인 김정은은 전직 NBA 선수 데니스 로드먼을 5차례나 초청했다. 로드먼은 평양을 다녀올 때마다 보고들은 것을 외부에 떠벌렸지만 김정은은 개의치 않는 것 같다. 김정은이 유일하게 공개하지 못한 게 모친 고용희다. 북에서 3등 시민 취급받는 재일교포 무용수 출신인 탓이다. 김정은 집권 10년이 지나도록 생일도 공개하지 못하는 속사정이다.
▶김정은은 지난 18일 신형 ICBM 발사 현장에 딸을 데려갔다. 로드먼이 2013년 방북 때 안아봤다는 둘째 주애일 가능성이 크다. 10세 전후일 어린 딸과 아버지가 놀이공원이 아니라 기립한 미사일 앞에서 손잡고 걸어가는 장면은 기괴했다. 유학 중이라는 2010년생 장남, 2020년생 막내 딸도 공개할지 모른다. 금수저가 아니라 ‘핵수저’ 자녀들이다. 미사일 발사가 성공하자 리설주는 손뼉을 쳤고, 김여정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는 듯했다. 평소와 달리 군 수뇌부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김씨 일가 보위를 책임지는 조직비서, 우상화 총책인 선전비서가 만세를 불렀다. ICBM 성공이 김정은의 집안 경사란 얘기다. 4대 세습도 된다는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할아버지·할머니 없이 부모와 자녀만으로 구성된 가족을 핵(核)가족이라고 불렀다. 대가족의 반대였다. 그런데 한자도 똑같은 ‘핵가족’이 평양에 등장했다. 북한 주민은 헐벗고 굶주렸다. 그런데 김씨 핵가족은 핵미사일로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지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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