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77] 괴물들과 싸우는 헤라클레스… 그리스 식민지 정복 과정이었다
헤라클레스의 12과업… 신화와 역사 사이
사자 가죽을 걸쳐 입고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있는 거구의 사내. 헤라클레스는 사실 밤에 길거리에서 만나면 간담이 서늘해질 인상이다. 막무가내의 힘과 육체성의 화신인 헤라클레스는 신화상에서 가장 인기 있고 사랑받는 주인공이다. 온 세상의 악당과 괴물들을 무지막지한 힘으로 부수고 나가는 정의의 사도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편에서 볼 때 정의의 사도지만, 맞는 편에서 보면 천하의 악당일 수밖에 없다. 과연 그가 쳐부순 적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왜 헤라클레스에게 처절하게 맞아야 했을까? 이유가 따로 있는 건 아니고, 단지 고대 그리스인들이 팽창해 나가는 지역의 주민들이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스는 고대 그리스 식민 팽창의 선두에 선 주인공이다. 상징적으로 이 신은 이방인의 세계에 힘으로 뚫고 들어가서 적을 한 방에 무너뜨리고 땅을 빼앗은 다음 그리스 문화를 전파하고 개량하는 역할을 맡아서 했다. 그가 한평생 쉴 틈 없이 세계를 돌아다니며 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광기에 사로잡혀 자기 가족까지 몰살
인간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위업을 마음껏 이룰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신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스는 최고 신 제우스와 인간 알크메네 사이에서 태어났다. 알크메네의 미모에 반한 제우스는 그녀의 남편 암피트리온이 전쟁터에 나간 사이에 그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침실에 들었고, 결국 알크메네는 신의 자손을 잉태하게 되었다. 제우스는 기쁨에 겨워 ‘페르세우스의 후손이 미케네의 통치자가 되리라’고 정했다. 알크메네가 페르세우스의 후손이기 때문에 그런 축복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뒤늦게 이 사실을 눈치챈 헤라(제우스의 아내인 여신)가 모든 일을 틀어놓았다. 또 다른 페르세우스의 후손 스테넬로스의 아내도 임신 중이었는데, 헤라는 알크메네의 출산은 늦추고 스테넬로스의 아들을 일곱 달 만에 빨리 나오게 하여, 결국 먼저 세상에 나온 에우리스테우스가 미케네의 왕이 되었다. 그가 바로 헤라클레스의 평생 라이벌이다.
청년 헤라클레스는 테바이의 공주 메가라를 아내로 맞아 세 아들을 얻었다. 이 첫 번째 결혼은 엄청난 비극으로 파국을 맞는다. 헤라클레스가 아내와 세 아이를 모두 죽이는 최악의 가정 폭력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어느 날 리코스라는 자가 테바이로 쳐들어와서 온 가족을 죽이려는 찰나에 헤라클레스가 돌아와 리코스를 죽였다. 그런데 이 순간 헤라클레스는 광기에 빠졌고, 자기 가족들까지 몰살했다. 헤라클레스는 광기 속에서 자신의 앞에 있는 게 리코스가 아니라 자신의 영원한 라이벌 에우리스테우스이고, 아이들과 아이 엄마는 에우리스테우스의 처자식이라고 상상했다. 그래서 활로 이 모든 사람들을 처단해 버린 것이다.
헤라클레스에 닥친 이 광기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가 힘으로 무찔러 죽인 리코스(Lykos)는 늑대라는 뜻이다. 늑대를 죽이는 파괴적인 힘 자체도 동물적인 힘이다. 리코스를 없애는 순간 그것의 여성형 대응물인 리사(lyssa)가 덮친 것인데, 이는 곧 인간이 동물의 세계로 타락해서 폭력을 휘두르는 상태를 가리킨다. ‘극대노’ 상태에 빠지면 인간성을 상실하고 늑대로 변한다. 다시 말해 리사는 도시와 문명을 파괴하고 인간관계를 파탄 내는 무질서한 힘이다. 영웅에게는 자기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이 야만의 힘을 정화하여 그리스적 정신으로 승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일을 맡아서 해준 것은 지혜의 여신 아테나와 영웅 테세우스다. 제정신을 찾은 헤라클레스가 자신이 저지른 짓을 깨닫고 비탄에 잠겨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자, 테세우스가 델포이의 신탁을 받아보라고 권한다. 신탁 내용은 미케네로 가서 에우리스테우스의 노예가 되어 그가 시키는 일들을 하라는 것이다. 에우리스테우스는 다름 아닌 헤라클레스에게 돌아갈 왕위를 빼앗은 자가 아닌가.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해 늘 부담스럽고 위협감을 주던 헤라클레스에게 열 가지 고난의 과업을 부과하여 괴롭혔다. 게다가 그중 두 가지는 치사한 핑계를 대서 무효 선언한 후 두 가지를 더 부과한다. 이것이 유명한 헤라클레스의 12과업이다.
그리스와 지중해 세계 각지의 괴물들을 처치하는 이 흥미진진한 모험은 실상 폭력적으로 이웃 지역에 쳐들어가서 식민지를 건설하는 과정을 나타낸다. 이 영웅담들이 벌어지는 공간을 추적해 보자.
네메아(Nemea,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동쪽)의 사자와 레르네(Lerne, 펠로폰네소스 반도 중남부, 아르고스만 근처)의 머리가 아홉 개의 용 히드라를 죽이는 첫 번째와 두 번째 과업은 모두 펠로폰네소스 지역 내부의 골칫거리를 해결한 일들이다. 그 다음 세 번째부터 여섯 번째까지 일들은 펠로폰네소스반도 북부와 중앙부를 무대로 한 일들로서, 제법 먼 곳에서 일어났다. 에리만토스(Erymanthos, 그리스 서부 지역)의 거대한 멧돼지 죽이기, 아르테미스 여신이 보호하는 케리네이아(Keryneia, 그리스 서부 아카이아 지역)의 암사슴을 산 채로 잡아오기, 스팀팔로스 호수의 괴조(怪鳥)들을 퇴치하기, 올림피아에 위치한 아우게이아스 왕의 축사를 청소하기 같은 일들이 그것이다.
그리스인의 해상 활동과 일치
그다음 일곱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 과업은 그리스 세계를 떠나 훨씬 먼 곳을 무대로 한다. 크레타의 황소를 잡아오기, 트라케의 왕 디오메데스의 사나운 식인 말들을 사로잡아 오기, 아마조네스(흑해 남쪽 지방)의 여왕 히폴리테의 허리띠를 가져오기, 에리테이아(Erytheia, 지중해 서쪽 끝에 위치한 공상의 섬)의 괴물 게리온의 소를 산 채로 잡기 등이 그것들이다. 마지막 남은 두 번의 과업은 아주 먼 상상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열한 번째 과업은 헤스페리데스(Hesperides, ‘저녁의 딸들’로 불리는 서쪽 나라 님프)의 정원에서 황금 사과를 훔쳐 오는 일인데, 이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리비아에서 길목을 지키는 거인 안타이오스와 싸워야 한다. 열두 번째 과업은 저승 세계인 하데스 왕국의 출입문을 지키는 머리 셋 달린 개 케르베로스를 잡아 오는 것이다. 이 마지막 과업까지 다 완수한 후 헤라클레스는 다시 자유의 몸이 된다.
열두 과업의 수행은 그리스 본토의 핵심 지역으로부터 점차 지중해 주변의 먼 지역으로 퍼져 간다. 이는 그리스인들의 해상 활동이 지중해 각 지역으로 확산하고 식민화가 진행되는 현상을 나타낸다. 이방인의 세계를 탐험하고 그 안으로 뚫고 들어가는 헤라클레스는 속성상 중간 존재다. 자신이 스스로 야만적 광기를 정화했듯, 우선 상대방 세계에 힘으로 뚫고 들어가서 그리스의 고상한 가치를 전파하며 그리스 세계로 만들어간다는 상징이다. 폭력적 인물이면서 중재자, 힘으로 문제를 강제 해결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식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이름부터 의미심장하다. 헤라클레스(Heracles)는 hera(영웅)와 cles(신)가 합쳐진 것이니, 인간 영웅이면서 신이 된 인물, 인간의 몸에서 태어났으나 결국 불멸의 신의 지위로 격상하여 올라간 존재다. 그의 죽음이 이런 점을 명료하게 말해준다. 그의 두 번째 아내 데이아네이라는 계략에 빠져서 히드라의 독 성분이 묻어 있는 옷을 남편 헤라클레스에게 입혔다. 독이 헤라클레스의 몸을 파고들자 온몸이 불이 붙는 듯했다. 최후가 다가온 것을 직감한 헤라클레스는 불타는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시신을 화장할 장작 더미를 쌓고 그 위로 올라가 아들에게 불을 붙이라고 지시했다. 왜 헤라클레스는 매장이 아니라 반드시 화장을 해야 했을까? 그의 혼이 하늘로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불 속에서 인간적인 부분들은 타서 없어지고 신성 부분만 남은 헤라클레스는 올림포스로 승천했다.
[여전사의 나라로]
헤라클레스 기운받은 아마조네스 여전사들 힘이 더욱 강력해져
신화는 고정된 게 아니라 여러 판본이 있다. 아마조네스를 찾아가는 모험담 또한 여러 종류의 이야기가 전한다. 그 중에선 선정성이 두드러진 판본도 있다. 이번 임무를 수행하려고 길을 떠날 때 우연히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가 헤라클레스를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두 영웅이 여인들의 나라에 도착했을 때 여왕 히폴리테는 테세우스의 용모에 반했다. 여왕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흥미로운 제안을 한다. 헤라클레스는 아마조네스의 여성 50명을 만족시켜 주어야 하며 그 기간 동안 자신이 테세우스와 동거하기로 하고, 그런 후에 자신의 허리띠를 주겠다는 것이다. 헤라클레스가 이 임무를 완수하려면 적어도 두어 달은 족히 걸릴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헤라클레스의 스태미나를 모르고 한 말이었다. 하룻밤이 지나고 테세우스와 히폴리테가 정답게 아침 식사를 하려는데 헤라클레스가 나타났다. 50명을 상대하는 일을 다했으니 빨리 허리띠를 내놓으라는 것이다. 그 후 헤라클레스의 기운을 타고난 자손을 얻은 아마조네스의 여전사들은 더욱 힘이 강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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