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79] 콜럼버스가 유럽에 소개한 고추… 튀르키예가 전세계 전파하다
[아메리카 작물] [下] 고추의 전파
1493년 1월 15일, 아메리카 대륙의 에스파뇰라 섬을 탐험하던 콜럼버스는 일지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이곳에서는 아히(aji)라는 값진 식물을 많이 재배한다. 사람들은 이 식물이 건강에 좋다고 생각해서 식사 때마다 반드시 챙겨 먹는다. 매년 선박 50척 정도 가득 이 식물을 실어 나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고추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고추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기원전 7000년부터 자연산을 거두어 먹었고, 그로부터 몇 세기 뒤부터 경작해 오던 작물이다. 원산지가 볼리비아 산지인지 혹은 멕시코인지 100% 정확하지는 않으나, 아메리카 대륙 각지로 퍼져 일상적으로 애용하는 음식 재료가 되었다. 15세기 말부터 유럽인들이 이 작물을 세계 각지로 전파했다. 이전 시대에 전 세계적으로 널리 보급된 향신료는 후추나 정향처럼 대개 아시아 산물이었는데, 이제 고추와 바닐라, 올스파이스 같은 아메리카산 향신료들이 더해져 세계인의 입맛을 바꾸어놓았다. 현재 세계 인구의 4분의 1이 매운 고추를 즐겨 먹는다.
세계 인구 4분의 1이 고추 즐겨 먹어
에스파냐 출신 선원과 상인들이 고추를 본국으로 가지고 간 후 이탈리아 일부 지역과 프랑스 남부 지역으로 전해졌다. 그렇지만 이런 지역 사람들이 고추를 즐겨 먹지는 않았다. 당시 유럽에서는 매운맛보다는 버터를 많이 사용하는 부드럽고 순한 맛의 음식들이 확산 중이었다. 프랑스 요리가 그런 흐름의 정점을 차지한다. 서유럽에서 고추는 음식 재료로는 제한적으로 사용되었을 뿐이고, 식물원에서 관상용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레온하르트 푹스(Leonhard Fuchs)라는 식물학자는 ‘식물사’(1549)에서 얼마 전부터 독일 각지에서 고추를 기르고 있다고 기술하면서, 놀랍게도 이 작물의 원산지를 인도의 콜카타라고 잘못 소개한다. 왜 그럴까? 에스파냐에서 동유럽 방향으로, 더 나아가서 세계 각지로 고추를 전파했으리라고 잘못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전혀 엉뚱한 곳으로부터 전해졌을 수 있다. 작물의 전파는 통상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경로를 거치게 마련이다. 사실 전 세계 각지로 고추를 전달한 사람들은 에스파냐인이 아니라 포르투갈인들이었다.
포르투갈 상인과 선원이 고추를 처음 접했을 가능성이 큰 곳으로는 브라질 동쪽 해안 혹은 파나마 지역을 든다. 이들은 아프리카와 대서양상의 섬들에 세운 자신들의 교역 거점들에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옥수수 같은 아메리카 신작물을 전파했고, 이때 고추가 따라 들어갔을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아시아의 교역 지점들로도 전달되었는데, 특히 인도의 고아(Goa)가 세계적 확산의 중요한 중간 거점이 되었다. 이곳으로부터 서쪽으로는 튀르키예로, 동쪽으로는 믈라카해협을 넘어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로 고추가 확산했다.
특기할 곳이 튀르키예의 아나톨리아 지역이다. 옥수수, 콩류, 호박, 고추 등 아메리카의 작물들이 광범위하게 전파되는 소위 ‘콜럼버스 교환 현상’에서 에스파냐 지역보다도 아나톨리아 지역이 오히려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를 ‘아나톨리아 미스터리(Anatolian mystery)’ 현상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아시아 내 해상·육상 교역로들을 통해 물품이 오가는 과정에서 인도에서 튀르키예로 작물들이 전달되었든지, 혹은 오스만제국 병사들이 인도를 공격하던 중 고추 같은 작물들을 얻어서 들여왔을 수도 있다. 아메리카 작물들은 아나톨리아 지역을 제2의 고향 삼아 번성했다. 이후 오스만제국 군이 오스트리아의 빈을 향해 공격하는 과정에서 다시 튀르키예로부터 발칸 지역과 헝가리로 고추가 확산했다. 고추는 특히 헝가리에서 사랑받는 작물이 되었다. 이곳에서는 파프리카 종 고추가 개발되었고, 이것을 활용한 굴라시 수프와 같은 국민 음식이 탄생했다.
다른 한편 인도로부터 동쪽으로도 고추가 확산해 갔다. 중국, 구자라트, 아랍 상인들이 교역 활동 과정에서 믈라카와 인도네시아로 확산시켰고, 다시 중국과 조선, 일본 방향으로 퍼져갔다. 그 구체적 경로가 모두 명쾌하게 밝혀진 건 아니다. 연구자들이 하나같이 강조하는 점은 신작물들의 전파 과정이 여러 시기에 여러 차례에 걸쳐 복잡다기한 경로를 거쳤으리라는 점이다.
한반도에 고추가 유입된 과정도 마찬가지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다양한 설들이 제시되어 있다. 우리나라 옛 문헌들은 대개 일본을 거쳐 한반도에 들어왔다고 기술한다. 예컨대 ‘지봉유설(芝峯類說·1613)’은 “남만초는 센 독이 있는데 왜국(倭國)에서 처음 들어왔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왜개자라 부른다. 때로 이것을 심은 술집에서 그 맹렬한 맛을 이용해 간혹 소주에 타서 팔고 있는데 이를 마신 자는 대부분 죽었다”고 한다. 사실 남만초(南蠻椒·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유입된 매운 양념 풀)와 왜개자(倭芥子·일본에서 들어온 겨자)라는 두 명칭을 거론한다는 것은 어디에서 들어온 건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반면 일본에서는 오히려 조선에서 들어왔다고 기록한다. ‘대화본초(大和本草·1709)’에서는 “옛날 일본에는 번초(蕃椒)가 없었는데, 조선을 칠 때 그 나라에서 종자를 가져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 이름을 고려호초(高麗胡椒)라 부른다”고 하고 있다. 조선은 일본에서 들어왔다고 하고, 일본은 조선에서 들어왔다고 기록한 것이다. 아마도 두 나라 모두 고추가 이미 전해진 상태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이후 광범위하게 보급되는 과정에서 양국 사람들 모두 전쟁 중 상대편 국가에서 들어온 것으로 믿게 된 듯하다.
‘성호사설(星湖僿說)’에 의하면 광해조부터 고추가 크게 보급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고추가 큰 환영을 받은 것은 아니다. 매운맛을 내는 달래, 마늘, 파, 생강, 천초 등이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고추가 매운맛을 내는 재료로 굳건히 자리를 잡은 것은 대체로 18세기부터의 일로 보인다. 이 시기에 고추를 사용하는 음식 관련 기록들이 많이 보일 뿐 아니라, 비로소 고추라는 이름이 정착되었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번초(蕃椒)를 향명(鄕名)으로 고초(苦草)라 한다”는 언급이 이를 말해 준다. 이전까지 ‘고초’는 산초나 후추를 가리키는 용어였는데, 일반인들이 이제 오늘날의 고추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기에 이른 것이다.
조선엔 광해군 무렵부터 널리 퍼져
김치의 발전 과정을 보아도 오랫동안 고추가 거의 쓰이지 않았다. 기록상으로는 18세기 중엽에 가서야 김치에 고추가 들어간다. 그러므로 사실 과거 김치는 ‘매운맛’보다는 ‘순한 맛’이었다. 우리 음식 전반에 고추가 압도적으로 많이 쓰이게 된 것은 일제감정기였다. 이 시대 신문기사에 “이렇게 자극성이 많은 고추를 두세 살 먹은 어린아이 적부터 사용하야 이것이 없이는 먹을 수 없이 중독이 되며 습관이 되어버립니다” 하고 한탄하는 글이 나올 지경이다. 갈수록 맛이 강해지는 현상은 현재에도 진행 중인 것으로 보인다. 낙지 요리 식당 주인의 인터뷰를 보면 십여 년 전보다도 현재 훨씬 매운 음식을 내야 손님들이 만족한다고 한다.
아메리카 원산의 고추가 보급되어 많은 나라의 음식이 매워진 현상은 우리가 예민하게 주목하지는 않았으나 사실 근대 세계에서 일어난 실로 중요한 현상이다. 물론 세계적으로 매운맛이 확산하는 가운데에도 각 나라마다 색다른 매운 음식을 창안해 냈다. 우리는 불같이 매운 인도 음식과도 다르고 비교적 순한 정도로 매운 헝가리 음식과도 다른 우리 나름의 독특한 매운 음식을 만들어냈다.
[김치의 변화]
처음엔 심심한 백김치… 18세기부터 고추 사용
김치의 재료와 만드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변화해 왔다.
조선시대 전기의 자료인 ‘수운잡방(需雲雜方·1481~1552)’에는 김치 재료로 무와 가지가 가장 보편적이고 동아도 비교적 널리 쓰였으나 배추는 잘 보이지 않는다. 양념은 단순해서 향신료로 천초와 할미꽃(白頭翁), 생강, 마늘 등이 보이지만, 아직 고추가 쓰이지 않았다. 조선 중기 자료인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1766)’에 이르면 김치 재료로 이전에는 없던 미나리와 갓이 쓰이고, 무엇보다 배추가 등장하지만 아직까지도 많이 쓰인 것은 아니다. 양념으로는 파, 마늘, 생강, 청각, 거목, 천초 외에 드디어 고추가 보인다. 조선 후기 자료인 ‘규합총서(閨閤叢書·1809)’를 보면 김치 재료로 무가 주로 쓰이고 오이, 가지, 동아 역시 많이 쓰이지만 무엇보다 배추가 증가하는 게 눈에 띈다. 대부분의 김치에 고추가 쓰인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러한 발전 과정을 보면 조선시대 중기를 지나면서 재료가 다양화·고급화되는 중이고 무엇보다 배추와 고추가 더 많이 쓰인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배추는 이전 시대에도 없지는 않았으나 19세기 말쯤 되어서야 오늘날과 같은 좋은 배추를 재배하게 되었다(예컨대 서울의 방아다리 배추가 이름을 날린 좋은 품종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가장 많이 먹는 배추 통김치는 ‘단군 이래’ 먹던 게 아니라 아메리카 원산의 고추가 들어오고 중국산 배추 종이 개량된 이후인 19세기 말 이후 진정 보편화된 역사적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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