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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상하이방의 종언

bindol 2022. 12. 11. 08:40

[만물상] 상하이방의 종언

입력 2022.12.02 03:08
 
 

상하이가 서양 역사에 처음 등장한 건 1842년이다. 아편전쟁에서 패한 청나라가 영국과 난징조약을 맺고 개항한 5개 항구 가운데 하나였다. 수천년간 작은 어촌이던 곳이 하루아침에 유럽 열강의 조계지 건설 각축장이 됐다. 1921년 7월 23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 한 건물에서 중국공산당 제1차 당대회가 열렸다. 상하이에서 13명이 의기투합해 만든 당이 28년 뒤 베이징 톈안먼에서 오성홍기를 내걸고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이 96세의 나이로 30일 별세했다. 사진은 지난 2017년 10월 24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19차 공산당 대회 폐회식 도중 장쩌민 전 국가주석이 시진핑 현 국가주석의 팔을 두드리는 모습이다. 장 전 주석은 시진핑 주석의 정적 그룹인 상하이방(상하이 출신 정재계 인맥)의 대부로 꼽힌다. 시진핑 집권 이후 부패와의 전쟁이라는 명목 아래 장 전 주석 측근 인물들이 대거 제거되기도 했다./AP 연합뉴스

▶중국 전역을 광기와 혼란에 빠뜨린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이 기획하고 부인 장칭(江靑)과 왕훙원, 장춘차오, 야오원위안 등 4인방이 주도한 것이다. 장칭은 상하이에서 배우였고 나머지도 상하이에서 경력을 쌓았다. 그래서 이들을 상하이방(上海幇)이라고도 불렀다. 이들은 권력 유지를 위해 1976년 마오쩌둥이 죽은 뒤에도 문혁을 이어가려 했다. 이들이 숙청되지 않았다면 덩샤오핑의 재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덩샤오핑은 1989년 톈안먼 시위를 진압하기로 결심한 뒤 상하이 당서기였던 장쩌민을 후계자로 낙점했다. 장쩌민은 당 총서기에 올랐지만 베이징 정가에선 촌뜨기 취급을 받았다. 그래서 자신이 정치 기반을 다진 상하이 인맥을 대거 발탁해 당·정·군 곳곳에 심었다. ‘문혁 상하이방’이 아닌 정반대 상하이방의 등장이다. 이 상하이방이 본격 득세하기 시작한 건 1997년 덩샤오핑 사망 이후다. 이들은 고도성장의 과실을 독식하며 권력과 부를 함께 누리는 세력으로 뿌리내렸다.

 

▶장쩌민은 집권 시절 김정일을 두 차례 초청했다. 김정일은 2000년 5월 베이징 중관춘 과학단지를 둘러본 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은 옳았다”고 했다. 2001년 1월 상하이를 시찰한 뒤엔 “세계가 놀라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상해는 천지개벽됐다”고 했다. 실제 장쩌민 시절 상하이는 천지개벽 수준의 변화를 이룩했다. 김정일도 느낀 게 있었던지 이듬해 장마당을 묵인하는 7·1 경제 관리 개선 조치를 내놓았다.

▶장쩌민은 은퇴한 뒤에도 막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후진타오 후계를 놓고 리커창과 경쟁하던 시진핑에게 힘을 실어준 것도 장쩌민이었다. 하지만 시진핑은 2012년 집권 후 돌변했다. 군, 금융, 조선 등 상하이방이 장악한 분야에 대대적 사정 작업을 벌였다. 10년에 걸친 반부패 운동으로 상하이방은 궤멸됐다. 이번 20차 당대회에서 꾸려진 차기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전원 시진핑 측근으로만 채워졌다. 그제 장쩌민이 사망했다. 상하이방의 종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