갸륵한 말본새[이준식의 한시 한 수]〈192〉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입력 2022-12-23 03:00업데이트 2022-12-23 03:27
옥을 다듬은 듯 잘생긴 사내 왕정국(王定國)을 늘 부러워했거늘,
마침 하늘이 그에게 온화하고 예쁜 낭자를 내려주었지.
낭랑한 노랫소리 고운 이에서 나와,
바람을 일으키면 눈발이 뜨거운 바다에 날리듯 청량하게 바뀐다고들 말하지.
만릿길 먼 남쪽에서 돌아왔지만 얼굴은 더 젊어 뵈고,
미소 지으면 웃음 속엔 영남 땅 매화 향기 아직도 배어 있네.
영남 땅 살기가 어렵지 않았냐 물으니,
‘제 마음 편한 곳이 바로 제 고향’이라는 뜻밖의 대답.
常羨人間琢玉郞, 天應乞與點소娘. 盡道淸歌傳晧齒, 風起, 雪飛炎海變淸凉.
萬里歸來顔愈少, 微笑, 笑時猶帶嶺梅香. 試問嶺南應不好, 却道, 此心安處是吾鄕.)
―‘왕정국의 시녀 우낭에게 주는 노래(증왕정국시인우낭·贈王定國侍人寓娘)’/‘정풍파(定風波)’ 소식(蘇軾·1037∼1101)
소동파가 친구 집 가기(歌妓)에게 노래 한 곡을 선사한다. 무슨 연유일까. 당파 싸움으로 동파가 남쪽 지방으로 밀려날 때 그의 정치적 동지 수십 명도 각지로 좌천되었다. 친구 왕정국 역시 그중 하나로 대륙의 최남단 광시(廣西)성으로 쫓겨났고 3년여 만에야 조정으로 복귀했다. 원래 그 집안에는 가기가 여럿 있었지만 이 좌천 길을 따라나선 여인은 우낭(寓娘)이 유일했다. 후일 친구와 재회한 자리에서 동파는 의리를 지킨 우낭의 사연을 접하게 된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새삼 돋보인다. 그 소리는 남녘의 찌는 듯한 바다에 눈발이 녹아들 듯 청량감을 안겨주고, 웃음 속에는 영남 땅 매화향이 배어 있는 듯 상큼하다.
풍토병이 나도는 오지에서의 고생담이나 듣겠거니 생각하고 시인이 ‘영남 땅 살기가 어렵지 않았는가’ 슬쩍 물었는데, ‘제 마음 편한 곳이 바로 제 고향이지요’란 의외의 대답. 이 누긋하고 갸륵한 말본새에 시인은 탄사를 아끼지 않았다. ‘정풍파’는 송사(宋詞)의 곡조 이름으로 내용과는 무관하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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