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현옥 금융팀 차장
이탈리아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을 설계한 조르조 바사리(1511~1574)는 ‘미술사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고딕 양식, 비잔틴 양식, 매너리즘 등 오늘날에도 널리 쓰이는 예술 용어가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이뿐만이 아니다. 인류가 그에게 크게 빚진 말이 있다. 르네상스(Renaissance·부활)다.
그의 책 『이탈리아의 건축가, 화가, 조각가들의 생애』(1550)에서 바사리는 ‘리나시타(Rinascita·재탄생)’라는 말을 썼다. 중세 1000년의 암흑기를 거쳐 그리스·로마 문화가 14~16세기 이탈리아에서 되살아난 학문과 예술의 부흥을 설명했다. 이 말이 프랑스어인 르네상스로 번역됐다.
르네상스가 정부의 화두로 떠올랐다. 지난 18일 산업통상자원부 업무보고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정부의 산업정책 부재를 질타하며 “제조업 르네상스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판 ‘러스트 벨트(Rust Belt·쇠락한 공장지대)’의 위기에 처한 4개 지역에 전기차 등 새로운 산업을 육성해 2만6000여 개의 일자리를 만든다는 전략이다. 중소벤처기업부는 지난 20일 자영업이 밀집한 구도심 상권을 복합 개발하는 ‘상권 르네상스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자영업 대책의 일환이다.
문명사학자 윌 듀런트는 『문명이야기』에서 르네상스가 피렌체에서 시작된 이유를 분석했다. 자양분은 피렌체로 흘러든 돈이다. 무역과 방직 산업의 성장에다 ‘유럽의 금융 수도’였던 덕이다. 은행업 등으로 재력을 쌓아 유럽을 쥐락펴락한 경제력과 권력을 쥔 메디치가(家)는 학문과 예술을 적극 후원했다.
메디치의 우산 아래 수많은 학자와 예술가들이 몰려들었다. 보티첼리와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갈릴레오 등이다. 돈과 천재성이 혁신이란 시너지를 내며 르네상스라는 꽃은 만개했다.
제조업 르네상스를 논하기에 현실은 척박하다. 르네상스를 이끌 기업은 몸을 사린다. 반(反)기업·반(反)시장 분위기 속 각종 규제에 발목이 잡혔다. 투자를 꺼리고 해외 이전을 모색한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올 상반기에만 1764개 신규 해외법인이 설립됐고 내년 국내 기업의 엑소더스는 더 가속화할 전망이다.
인재도 떠나고 있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의 ‘두뇌유출지수’는 지난해 63개국 중 54위로 떨어졌다. 부활의 동력이 사라지고 있다. 르네상스의 조건은 구호나 계획이 아니다. 역량을 발휘할 여건과 환경이다. 척박한 땅에서 꽃이 피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현옥 금융팀 차장
[출처: 중앙일보] [분수대] 르네상스의 조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