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캄한 길 달리는 대한민국 버스
방향은 분명, 속도 놓고 논쟁해야
현실주의의 가장 큰 적은 ‘단순화’
그간 사회성 짙은 소재로 소설을 써 왔다. 과업이 없다는 생각에 무기력에 빠지는 청년들, 한국이 싫어서 이민을 간다는 세태, 인터넷 여론 조작 등. 최근에 낸 단행본에서는 2010년대 한국의 노동과 경제 현실을 다뤘다.
이런 책들을 내고 언론 인터뷰를 하게 되면 한두 번씩 받게 되는 질문이 있다. “당신은 스스로를 보수주의자라고 하면서 왜 이런 소설을 썼느냐?”는 것이다. 처음 그 질문을 받았을 때에는 당황해서 할 말을 잃었다. ‘설마 보수는 청년 문제,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싶었는데, 그 설마가 맞았다. 요즘은 그냥 간편하게 ‘보수는 악’이라고 믿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가끔은 그런 명쾌함이 부럽다.
내가 이해하는 진보와 보수는 방향에 대한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속도에 대한 것이다. 가야 할 방향은 명확히 정해져 있다. 경제의 역동성을 잃지 않으면서 사회안전망도 튼튼한 사회. 잠재력을 펼치고자 하는 이들은 기회를 얻고, 경쟁의 최전선에서 한 발 물러나도 미래가 두렵지 않은 세상. 그것이 가능한가 하고 물으면 북유럽을 보라고 답하겠다. 우리와 여건이 다른 북유럽의 제도를 직수입하자는 것은 아니다. 북유럽 사람들이 해낸 일은 우리도 할 수 있을 거라는 얘기다.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대형 버스를 타고 그런 나라를 향해 간다. 운전대를 잡은 사람이 가속 페달을 얼마나 세게 밟아야 하는가를 놓고 늘 논쟁이 벌어진다. 마음이 급한 이들은 빨리 달리자고 한다. 겁이 많은 사람들은 천천히 조심스럽게 가자고 한다. 그것이 내가 이해하는 건강한 진보와 보수의 논쟁이고, 나는 겁이 많은 쪽이다.
‘몇 년까지 최저임금 만 원’이라는 말에 내가 비판적인 이유는 ‘만 원’이라는 방향 때문이 아니다. ‘몇 년까지’라는 속도 때문이다. 우리 앞에 놓인 길은 험난하다. 구불구불한 비포장도로에 곳곳이 패었고, 주변은 어둡다. 파괴적인 신기술이라는 웅덩이도 있고, 금융위기라는 낙석이 떨어지기도 한다. 차량 자체도 튼튼하지 않다. 자영업과 중소기업이 취약하고, 대외의존도가 높다. 내부 갈등조정능력은 거의 없는 수준 아닌가 한다. 이런 차로 이런 길을 달릴 때 최선은 언제나, 상황 봐서 페달 밟는 것 아닐까. 자칫하다가는 차가 엎어지고, 더 나쁘게는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도 있다.
‘너는 가진 게 있으니까 급하지 않은 거야, 너는 당해보지 않아서 서럽지 않은 거야’라는 지적은 달게 받아들인다. ‘혹시 내가 더 멀리 보는 건 아닐까’ 하고 반박하고 싶지는 않다. ‘운전석에 앉아본 적이 없을수록 운전을 쉽게 생각한다’는 주장에는 반쯤 동의하고 반쯤 반대한다. 그 논리를 밀어붙이면 세대교체가 불가능해진다. 게다가 한국 조직들은 운전석에 앉을 순서를 대개 실력이 아니라 연공서열로 정한다.
내가 생각하는 보수주의는 현실주의다. 현실은 복잡하고 회색이다. 앞에 탄탄대로가 놓이는 상황은 드물다. 그러므로 현실주의자의 다리는 자주 감속 페달을 향해 뻗는다. 대중과 역사가는 가속 페달을 밟는 뜨거운 발에 우호적이다. 상관없다. 두 페달을 적절히 밟으며 우리가 탄 버스가 부드럽게 목적지에 이르기를 바랄 따름이다.
보수와 진보에 대한 이런 규정에 동의하는 한국인이 얼마나 있을까. 옛 바른정당 지지율쯤 되려나? 그러나 이것만큼은, 나의 정의(定義)를 양보하고 싶지 않다. 죽창가를 올리는 페이스북 계정이나 확성기 소리 시끄러운 태극기 집회를 진보, 보수라고 부르기 부끄럽다. 그보다는 조선 말기 붕당 같은 걸로 이해한다.
현실을 살피자는 목소리를 낼 때 ‘현실과 타협한다’는 비난을 받으면 어리둥절해진다. 그러면 현실과 타협하지, 무엇과 타협하라는 말인가. 이상과 타협하라는 건가? 이상은 타협 대상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현실의 반대말은 이상이 아니라 구호와 아포리즘이다. 이런 단순한 말들은 어떤 층위에서는 진실을 담기도 한다. ‘초고층 빌딩은 하늘을 찌르는 페니스’라는 서술은 자연을 정복 대상으로 보는 현대문명의 한 속성을 날카롭게 고발한다. 그런데 저 표현을 그대로 몇 층 아래로 가지고 내려와 ‘그러므로 저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는 남근 콤플렉스가 있다’고 이어가면 얘기가 우스워진다.
세상을 그렇게 보는 이들을 뭐라 불러야 하나 고심했는데, 모이제스 나임의 책 『권력의 종말』을 읽다가 적당한 용어를 발견했다. ‘단순주의자’라는 단어였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단순주의자가 이쪽 저쪽에 너무, 너무 많다.
장강명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