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여행을 하게 되면 주로 껍데기를 많이 보는 것 같고, 국내 여행을 하면 속살을 본다. 속살은 무엇이냐? 뿌리를 보는 게 속살이다. 뿌리는 땅속에 묻혀 있어서 잘 보이지 않지만 그 뿌리의 깊이와 형태에 따라서 나무의 무성함과 가지, 이파리, 또는 열매까지 정해진다. 근기(根機·뿌리의 모양)는 이래서 중요하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 보이는 부분을 좌우한다.
국내 여행을 하면서 '뿌리 깊은 나무가 바로 이런 나무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은 사례가 있다. 안동시 와룡면 주하리에 있는 경류정(慶流亭)의 향나무이다. '경류정'은 택호이다. 바로 퇴계 선생 증조부 집이다. '선경류방(善慶流芳)'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적선을 많이 하면 경사가 있고, 이 경사가 시냇물처럼 흐르면서 그 향기를 내뿜는다는 뜻이다. 산골이면서도 그리 높지 않은 야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지형적 특징을 보여주는 곳이 이 지역이다. 산골이 주는 그윽함을 풍기면서도 위압적인 산세가 아니다. 조선 선비의 인품은 이 산세와 같은 게 아닐까.
경류정의 마당에는 600년 된 향나무가 가지를 뻗고 있다. 거대한 우산을 펼쳐 놓은 모양 같다. 높이는 2m가 넘지 않지만 옆으로 뻗은 가지는 세월을 말해준다. 조선 초기 6진을 개척하면서 영변판관을 지냈던 이정(李禎)이 약산산성 쌓는 일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 영변에서 향나무 묘목 3그루를 가져왔다. 그 한 그루가 현재의 경류정 뚝향나무인 것이다. 이 600년 된 향나무는 향기가 강해서 모기, 파리가 접근할 수 없다. 주변이 자동적으로 청정해진다. 유럽 켈트족의 신목(神木)이 참나무(오크)였다면 진성 이씨들의 신목은 바로 이 뚝향나무였다. 퇴계 선생이 배출된 뿌리가 바로 이 향나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향나무는 유교의 제사 의례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나무이다. 모든 제사는 향을 피워야 하기 때문이다. 향은 하늘로 올라가 조상의 혼(魂)과 연결되고, 술은 땅에다가 부어서 조상의 백(魄)과 연결된다고 믿었다. 향나무가 오래되어야 나무 속의 심이 붉어지고, 이 속심이 붉어진 부
분을 태워야 향이 진하게 나온다.
21대 종손인 이세준(李世俊·72)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이 경류정을 가꾸고 보존하는 데 자신의 일생을 다 보냈다. 다른 지역에는 없는 풍속이다. "선대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장사를 하지 말고, 운전을 배우지 말고, 시내버스를 타고 다니지 말라고 조부님으로부터 배웠습니다." "버스는 왜?" "경류정 종손의 품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