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11〉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은 상하이에서 춘제(春節)를 보내곤 했다. 1983년도 마찬가지였다. 상하이에서 푹 쉬고 춘제 기간이 끝나자 가족들과 쑤저우(蘇州)로 이동했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둘째 부인 천제루(陳㓗如·진결여)의 사저를 개조한 초대소에 머무르며 유유자적했다. 업무는 거의 보지 않았다. 당시 쉬자툰(許家屯·허가둔)은 장쑤성(江蘇省) 제1서기였다. 덩샤오핑에게 현지상황을 설명하고 싶었다. ‘덩샤오핑 판공실’ 주임에게 시간을 안배해 달라고 요청했다. 주임은 20분을 초과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27년간 장쑤성서 근무한 지방관리 쉬자툰은 27년간 장쑤성 서기와 성장, 난징군구(南京軍區) 정치위원을 역임한, 전형적인 지방관리였다. 면담이 잡히자 당황했다. 무슨 말을 하면 좋겠냐고 판공실 주임에게 물었다. “진부한 내용은 싫어한다. 노인은 처음 들어보는 소리를 좋아한다”는 대답에 안심했다. 덩샤오핑은 듣기만 했다. 가끔 하는 질문도 쉬자툰이 하고 싶은 말들이었다. 장쑤성이 다른 곳에 비해 성장 속도가 빠른 이유를 물었다. 쉬자툰은 주변 상황을 설명하며 자신의 경험을 곁들였다. “문혁시절 4년간 추방당했다. 무슨 과오가 있었는지 진지하게 분석했다. 간부들에게 법과 원칙을 지키라고 강조하면서 내가 어긴 적이 많았다. 오만 때문이었다. 그런 범죄를 다시는 저지르지 않겠다고 새기고 새겼다. 그간 시장(市場)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몰랐다. 시장은 서로 경쟁하며 규정과 원칙을 만들어 내는 곳이다. 성 정부가 지역별로 통제와 자율을 실시했다.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둔 곳이 효과가 있었다. 다른 간부들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지만 복권되자 금세 까먹었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 비해 반성 기간이 긴 편이다. 시간이 지나면 과오를 반복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은퇴가 임박한 것이 다행이다.” 덩샤오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다. 시장이 중요하다”며 씩 웃었다. 1개월 후, 당 중앙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호요방)이 쉬자툰을 베이징으로 불렀다. “덩샤오핑 동지가 중앙상무위원회에서 네 얘기 많이 했다. 장쑤성의 발전이 괄목할 만하다며 칭찬이 그치지 않았다. 은퇴를 유보하자는 의견에 상무위원 전원이 동의했다.” 장쑤성에는 쉬자툰의 유임을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일찍 입당했지만 직급은 아래였던 사람들이 백방으로 쉬자툰을 걸고 넘어졌다. 베이징까지 달려가 원로들에게 쉬자툰의 은퇴를 요구했다. 이유도 다양했다. “아직도 홍콩에는 국민당 지지자가 많다. 백만 명을 웃돈다. 영국이 홍콩을 떠날 날도 14년밖에 남지 않았다. 홍콩의 주권은 중국에 귀속시키고 관리는 계속하겠다는 영국의 주장에 동조하는 홍콩인들이 많다. 쉬자툰은 당성(黨性)이 강하고, 사상이 개방적인 공산주의자다. 당원이 아닌 사람을 우리 편으로 만드는 통전(統一戰線) 능력이 남다르다. 지금 홍콩에는 이런 사람이 필요하다. 현재 신화통신사 홍콩분사 사장이 공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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