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12〉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은 북벌과 항일전쟁을 위해 두 차례 합작했다. 1차 합작시절(1924~27) 국·공 양당은 소련의 지원을 받았다. 이때부터 중공은 홍콩에 지하조직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일본과의 전쟁을 위해 2차 합작이 성사됐다. 항일전쟁(1937~45) 시절에도 홍콩의 중공지하조직은 활동을 그치지 않았다. 1차 국공합작 때 홍콩 지하망 구축 전쟁 초기, 중공의 주력부대였던 8로군과 신4군은 자금과 물자 결핍에 시달렸다. 해외 교포와 홍콩인들의 지원이 시급했다. 중공측 대표 자격으로 수도 난징(南京)에 와있던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영국대사를 찾아갔다. “8로군과 신4군의 영웅적인 항일을 흠모하는 해외 화교들이 홍콩을 통해 의연금과 물자, 약품을 보내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인수를 위해 홍콩에 사무실(辦事處)를 개설코자 한다. 우리의 뜻을 홍콩 총독에게 전해 주기 바란다.” 홍콩의 영국 정부는 찬성도 안 하고 반대도 안 했다. 랴오청즈는 중심가에서 약간 비켜난 곳에 대형 사무실을 열었다. 허락이 아닌 묵인된 기관이다 보니 남중국 광둥(廣東)을 의미하는 웨화공스(粤華公司)라는 간판을 내걸고 차(茶) 도매상으로 위장했다. 공식 명칭은 홍콩주재팔로군판사처(香港駐在八路軍辦事處)였다. 웨화공스 초기 요원인, 전 신화통신 홍콩분사 부사장 량상위완(梁上苑·양상원)의 구술을 소개한다. 판사처의 중요 임무는 세계 각지에 있는 화교들이 보낸 성금과 물자 관리였다. 화교들은 홍콩에 있는 은행으로 돈을 송금했다. 당시 홍콩은 반공 정서가 강했다. 공산당이라는 말만 나와도 무섭다며 두려워하는 사람 천지였다. 팔로군판사처나 웨화공스 이름으로 구좌를 개설해주는 은행이 없었다. 화교와 기업인들이 보낸 돈은 랴오청즈의 외사촌인 은행 간부 통장을 통해 판사처로 들어갔다. 신화통신 홍콩분사의 할아버지 격인 웨화공스는 4년간 존속했다. 1942년 1월, 일본이 홍콩을 점령하자 간판을 불사르고 홍콩을 떠났다. 신화통신 홍콩분사는 1947년에 설립됐다. 거의 동시에 중공 남방국도홍콩마카오 공작위원회(工委)를 출범시켰다. 분사 초대 사장 차오관화(喬冠華·교관화)는 공작위원회 위원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에도 영국은 홍콩에 영사관 설립을 건의했다. 신중국 외교를 전담하던 저우언라이는 몇 년 전 장제스가 했던 것과 같은 이유를 대며 거절했다. 랴오청즈에게 홍콩의 조직을 정비하라고 지시했다. 홍콩마카오 공작위원회도 당 중앙이 직접 관리하자 랴오청즈는 당과 국무원의 홍콩마카오 업무를 독점했다. 이런 상황은 1983년 6월, 랴오청즈가 사망하고, 쉬자툰(許家屯·허가둔)이 신화통신 홍콩분사 사장으로 부임할 때까지 변치 않았다. 홍콩은 장기간 중공 활동의 중요 거점이었다. 영국의 통치를 받는 곳이다 보니 중공의 활동은 비밀투성이였다. 신중국 성립 후 상황이 변했다. 중국 공산당이 집권당이 되자 중·영 양국은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맺었다. 한국전쟁에 중국이 참전하고, 영국도 군대를 파견했지만, 영국군은 중국지원군과의 전투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홍콩의 중공지하당을 엄격히 단속하던 영국의 태도도 변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홍콩에 파견하는 기구가 늘어나자 파견 인원이 늘어났다. 당원 수도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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