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

베일에 싸였던 신화통신 홍콩분사, 중공 지하당원이 절반

bindol 2020. 2. 8. 05:55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12〉

랴오청즈(앞줄 오른쪽 셋째)는 한반도와도 인연이 많았다. 1951년 1월, 중국지원군 위문단 이끌고 한국을 방문했다. [사진 김명호]

랴오청즈(앞줄 오른쪽 셋째)는 한반도와도 인연이 많았다. 1951년 1월, 중국지원군 위문단 이끌고 한국을 방문했다. [사진 김명호]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은 북벌과 항일전쟁을 위해 두 차례 합작했다. 1차 합작시절(1924~27) 국·공 양당은 소련의 지원을 받았다. 이때부터 중공은 홍콩에 지하조직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일본과의 전쟁을 위해 2차 합작이 성사됐다. 항일전쟁(1937~45) 시절에도 홍콩의 중공지하조직은 활동을 그치지 않았다.
 

1차 국공합작 때 홍콩 지하망 구축
항일 지원 물자 전달 거점으로 활용

일본 패망 이후 중공 유격대 진입
국민당, 영국에 반환 요구 안 해

구성원들 소속 기관 너무 복잡해
홍콩분사 사장 쉬자툰 개혁 결심

전쟁 초기, 중공의 주력부대였던 8로군과 신4군은 자금과 물자 결핍에 시달렸다. 해외 교포와 홍콩인들의 지원이 시급했다. 중공측 대표 자격으로 수도 난징(南京)에 와있던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영국대사를 찾아갔다. “8로군과 신4군의 영웅적인 항일을 흠모하는 해외 화교들이 홍콩을 통해 의연금과 물자, 약품을 보내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인수를 위해 홍콩에 사무실(辦事處)를 개설코자 한다. 우리의 뜻을 홍콩 총독에게 전해 주기 바란다.” 홍콩의 영국 정부는 찬성도 안 하고 반대도 안 했다.
 
1938년 1월, 중공 중앙은 랴오청즈(廖承志·요승지)를 홍콩에 파견했다. 랴오청즈는 국민당 원로 랴오중카이(廖仲愷·요중개)와 홍콩의 부잣집 딸 허샹잉(何香凝·하향응)의 아들이었다. 국부 쑨원(孫文·손문)의 무릎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중국 혁명의 귀공자였다. 홍콩, 동남아, 미국 등 해외에 친가와 외가 친척들이 널려있었다. 랴오청즈가 홍콩에 동년배들만 모아놓고 저녁을 먹은 적이 있었다. 각 분야에서 한몫하는, 미남 미녀들로 10명이 앉는 식탁 10개가 부족했다. 
 
중국 혁명의 귀공자 랴오청즈 홍콩 파견
 

홍콩 부임 3개월 후, 보고 차 베이징을 찾은 쉬자툰(왼쪽 둘째). 1983년 11월, 베이징. [사진 김명호]

홍콩 부임 3개월 후, 보고 차 베이징을 찾은 쉬자툰(왼쪽 둘째). 1983년 11월, 베이징. [사진 김명호]


랴오청즈는 중심가에서 약간 비켜난 곳에 대형 사무실을 열었다. 허락이 아닌 묵인된 기관이다 보니 남중국 광둥(廣東)을 의미하는 웨화공스(粤華公司)라는 간판을 내걸고 차(茶) 도매상으로 위장했다. 공식 명칭은 홍콩주재팔로군판사처(香港駐在八路軍辦事處)였다. 웨화공스 초기 요원인, 전 신화통신 홍콩분사 부사장 량상위완(梁上苑·양상원)의 구술을 소개한다.
 
“웨화공스는 광둥의 중공 조직과 중앙에서 나온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정보수집과 역정보 생산, 화교 업무와 선전에 주력했다. 구성원들은 서로 어디서 무슨 일 하다 왔는지를 알려고 하지 않았다. 해외 화교나 홍콩의 저명인사들은 공개된 장소에서 우리를 만나기 싫어했다. 홍콩정부와 국민당 특무의 감시가 심했던 랴오청즈는 외부에서 사람들과 접촉했다. 우리는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키신저는 대륙을 방문할 때마다 홍콩을 경유해 쉬자툰을 먼저 만났다. [사진 김명호]

키신저는 대륙을 방문할 때마다 홍콩을 경유해 쉬자툰을 먼저 만났다. [사진 김명호]


판사처의 중요 임무는 세계 각지에 있는 화교들이 보낸 성금과 물자 관리였다. 화교들은 홍콩에 있는 은행으로 돈을 송금했다. 당시 홍콩은 반공 정서가 강했다. 공산당이라는 말만 나와도 무섭다며 두려워하는 사람 천지였다. 팔로군판사처나 웨화공스 이름으로 구좌를 개설해주는 은행이 없었다. 화교와 기업인들이 보낸 돈은 랴오청즈의 외사촌인 은행 간부 통장을 통해 판사처로 들어갔다. 신화통신 홍콩분사의 할아버지 격인 웨화공스는 4년간 존속했다. 1942년 1월, 일본이 홍콩을 점령하자 간판을 불사르고 홍콩을 떠났다.
 
일본이 패망하자 선쩐 일대에서 활약하던 중공 유격대가 홍콩에 진입했다. 한발 늦은 영국군과 함께 일본군을 무장 해제시켰다. 집권 국민당은 영국 측에 홍콩 반환을 요구하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 승리 후 영국의 위상이 하늘을 찌를 때였다. 영국은 홍콩에 영사관을 개설하라고 장제스(蔣介石·장개석)에게 제의했다. 장제스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홍콩은 중국 땅이다. 자국 영토에 영사관 개설은 말도 안 된다.” 대신 관방기구로 중화여행사를 설립했다. 총경리는 국민당 중앙위원 중 홍콩 전문가를 파견했다.
 

1953년 1월, 세균전 조사를 위해 한국을 방문한 랴오청즈. [사진 김명호]

1953년 1월, 세균전 조사를 위해 한국을 방문한 랴오청즈. [사진 김명호]


신화통신 홍콩분사는 1947년에 설립됐다. 거의 동시에 중공 남방국도홍콩마카오 공작위원회(工委)를 출범시켰다. 분사 초대 사장 차오관화(喬冠華·교관화)는 공작위원회 위원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에도 영국은 홍콩에 영사관 설립을 건의했다. 신중국 외교를 전담하던 저우언라이는 몇 년 전 장제스가 했던 것과 같은 이유를 대며 거절했다. 랴오청즈에게 홍콩의 조직을 정비하라고 지시했다.
 
중공 중앙은 남방국 산하 홍콩마카오 공작위원회가 하던 일을 중공 광둥성 위원회에 위임했다. 문혁 발발 전까지 홍콩마카오 관련 업무는 ‘국무원 외사판공실 홍콩마카오공작소조’가 전담했다. 소조 조장은 랴오청즈였다. 당 업무는 광둥성 위원회가 했다. 문혁이 끝나자 국무원 외사판공실은 홍콩에서 손을 뗐다. 홍콩마카오판공실을 발족시켰다. 주임은 역시 랴오청즈였다.  
  
공산당 집권 후 중·영 정식 외교관계 맺어
 

1983년 6월 7일, 가족과 함께 생애 마지막 모습을 남긴 랴오청즈. 3일후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진 김명호]

1983년 6월 7일, 가족과 함께 생애 마지막 모습을 남긴 랴오청즈. 3일후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진 김명호]


홍콩마카오 공작위원회도 당 중앙이 직접 관리하자 랴오청즈는 당과 국무원의 홍콩마카오 업무를 독점했다. 이런 상황은 1983년 6월, 랴오청즈가 사망하고, 쉬자툰(許家屯·허가둔)이 신화통신 홍콩분사 사장으로 부임할 때까지 변치 않았다. 홍콩은 장기간 중공 활동의 중요 거점이었다. 영국의 통치를 받는 곳이다 보니 중공의 활동은 비밀투성이였다. 신중국 성립 후 상황이 변했다. 중국 공산당이 집권당이 되자 중·영 양국은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맺었다. 한국전쟁에 중국이 참전하고, 영국도 군대를 파견했지만, 영국군은 중국지원군과의 전투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홍콩의 중공지하당을 엄격히 단속하던 영국의 태도도 변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홍콩에 파견하는 기구가 늘어나자 파견 인원이 늘어났다. 당원 수도 증가했다.


 
중·영 양국 간에 홍콩반환 담판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홍콩 공산당의 기층조직은 신중했다. 숨을 죽이고 공개활동을 하지 않았다. 홍콩마카오 공작위원회를 이끌던 신화통신 홍콩분사가 베일을 벗기 시작했을 때도 여전했다. 쉬자툰의 구술을 소개한다.  
 
“랴오청즈가 홍콩의 당 조직을 관장하던 시절, 홍콩의 비밀 지하조직은 지하당과 흡사했다. 두 사람 이상 모이는 법이 없었다. 단선 지도체제로 랴오청즈에게 직접 보고했다. 내가 분사 사장으로 부임했을 때 당원 수는 6000명 정도였다. 3000명 정도가 파견 나온 당원이고 나머지는 지하당원이었다. 홍콩마카오 서기였던 나도 지하당원의 최고 책임자가 누구인지 짐작만 할 뿐 정확히는 몰랐다. 파견 나온 당원들의 소속기관도 총참모부, 화교위원회, 공안부, 외교부, 국가안전부, 화교위원회 등 다양했다.” 쉬자툰은 홍콩분사를 뜯어 고치기로 작심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