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13〉 개혁처럼 듣기 좋은 말도 없다. 대단한 것 같지만 별것도 아니다. 개방만 시키면 개혁은 저절로 된다. 문 닫아걸고, 하루아침에 세상 바꾸겠다고 나대는 것은 위험하다. 신화통신 홍콩분사도 1983년 6월 30일, 신임사장 쉬자툰(許家屯·허가둔)이 부임하기 전까지는 비밀 덩어리였다. 문은 있어도 항상 닫혀 있었다. “깊은 바닷속처럼 뭘 하는지 알 수 없는 곳”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사장은 두문불출, 분사 밖을 나오지 않았다. 가끔 외출해도 만나는 사람이 한정되다 보니 시행착오가 많았다. 대륙이 소용돌이에 휩싸였던 문혁 시절엔 가관이었다. 사탕이나 빨면 어울릴 애들까지 마오쩌둥 숭배에 동원했다. 신화통신 홍콩분사 사장으로 부임 양웨이린, 20년간 대중 앞에 안 나타나 1967년 5월 6일 홍콩에서 벌어진 ‘까오룽(九龍) 폭동’은 아직도 통일된 명칭이 없다. 좌파들에겐 영국의 통치에 저항한 ‘반영항폭(反英抗暴)’ 이었지만, 일반 홍콩인들 눈엔 좌파난동이었다. 대륙에서 문혁이 한참이다 보니 ‘홍콩식 문화대혁명’ 이란 꼬리표도 붙어 다녔다. 3개월간 계속된 폭동의 배후는 당시 신화통신 홍콩분사 사장 양웨이린(梁威林·양위림)이었다. 까오룽 폭동은 실패한 공작이었다. 홍콩인들에게 공산당에 대한 공포와 혐오감만 남겼다.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마오쩌둥에게 양웨이린의 소환을 건의했다. “양웨이린은 대사를 그르칠 극좌 분자다. 고질적인 조급증 환자다. 불필요한 난동으로 홍콩 정부의 탄압만 자초했다. 많은 당원이 등을 돌리고 지하조직만 노출했다. 비축해둔 당의 기력이 손상되고 홍콩에서 우리의 입지가 좁아졌다. 회복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양웨이린은 모든 책임을 4인방에게 뒤집어씌웠다. 홍콩을 떠날 때까지 자신의 독특한 방법을 바꾸지 않았다. 후임 왕쾅(王匡·왕광)은 유명한 기자 출신이었다. 전국의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글솜씨가 빼어났다. 방문 닫아걸고 고전에만 몰두했다. 본의 아니게 양웨이린과 똑같다는 소리를 들었다. 모셔만 두고 입지는 않았다. 홍콩 부임 전날 광저우(廣州)에서 처음 입어봤다. 옆에 있던 부사장이 기겁했다. 동복이라며 당장 벗으라고 재촉했다. 거울을 보니 내가 봐도 흉했다. 동복은 그렇다 치더라도 맞지 않았다. 통은 넓고 단이 짧았다. 여름에 색안경 끼는 습관이 있었다. 광저우 역전에 노점이 즐비했다. 안경이 신기할 정도로 저렴하고 써보니 시원했다. 홍콩 도착 무렵 머리가 띵했다. 맥주병 깎아 만든 안경알이라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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