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

쉬자툰 “중국 공산당 비판도 수용할 준비가 돼 있다”

bindol 2020. 2. 18. 06:16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13〉

문혁시절 홍콩 좌파는 지금의 신계(新界)지역에서 조직적인 활동을 했다. 마오쩌둥 어록을 낭송하는 아동들. 1969년 홍콩 신계. [사진 김명호]

문혁시절 홍콩 좌파는 지금의 신계(新界)지역에서 조직적인 활동을 했다. 마오쩌둥 어록을 낭송하는 아동들. 1969년 홍콩 신계. [사진 김명호]

개혁처럼 듣기 좋은 말도 없다. 대단한 것 같지만 별것도 아니다. 개방만 시키면 개혁은 저절로 된다. 문 닫아걸고, 하루아침에 세상 바꾸겠다고 나대는 것은 위험하다. 신화통신 홍콩분사도 1983년 6월 30일, 신임사장 쉬자툰(許家屯·허가둔)이 부임하기 전까지는 비밀 덩어리였다. 문은 있어도 항상 닫혀 있었다. “깊은 바닷속처럼 뭘 하는지 알 수 없는 곳”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사장은 두문불출, 분사 밖을 나오지 않았다. 가끔 외출해도 만나는 사람이 한정되다 보니 시행착오가 많았다. 대륙이 소용돌이에 휩싸였던 문혁 시절엔 가관이었다. 사탕이나 빨면 어울릴 애들까지 마오쩌둥 숭배에 동원했다.
  

신화통신 홍콩분사 사장으로 부임
전임 사장들과 달리 공개 활동

“민의를 존중하고 개방된 사람”
홍콩 대표적 우파 신문도 극찬

‘홍콩식 문혁’ 꼬리표 까오룽 폭동
배후는 당시 신화통신 분사 사장

양웨이린, 20년간 대중 앞에 안 나타나
 

홍콩총독 에드워드 유드(Edward Youde)를 예방한 쉬자툰. 1983년 7월8일 오후, 총독부 문전. [사진 김명호]

홍콩총독 에드워드 유드(Edward Youde)를 예방한 쉬자툰. 1983년 7월8일 오후, 총독부 문전. [사진 김명호]

1967년 5월 6일 홍콩에서 벌어진 ‘까오룽(九龍) 폭동’은 아직도 통일된 명칭이 없다. 좌파들에겐 영국의 통치에 저항한 ‘반영항폭(反英抗暴)’ 이었지만, 일반 홍콩인들 눈엔 좌파난동이었다. 대륙에서 문혁이 한참이다 보니 ‘홍콩식 문화대혁명’ 이란 꼬리표도 붙어 다녔다. 3개월간 계속된 폭동의 배후는 당시 신화통신 홍콩분사 사장 양웨이린(梁威林·양위림)이었다.
 
양웨이린은 학생 시절 동경유학생회 회장을 지낸 극좌 활동가였다. 항일 빨치산과 광둥성 교육청장, 부성장을 지낸 원로 혁명가였다. 1958년부터 20년간 신화통신 홍콩분사 사장을 역임하며 양웨이린 시대를 선보였지만 대중 앞에 나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홍콩 애착은 남달랐다. “홍콩은 광둥의 일부다. 광둥 출신이 관리해야 한다.”
 

장쩌민(오른쪽)은 상하이 시장시절 신화통신 홍콩분사 사장자리를 탐냈다. 쉬자툰(가운데)을 자주 예방했다. [사진 김명호]

장쩌민(오른쪽)은 상하이 시장시절 신화통신 홍콩분사 사장자리를 탐냈다. 쉬자툰(가운데)을 자주 예방했다. [사진 김명호]

까오룽 폭동은 실패한 공작이었다. 홍콩인들에게 공산당에 대한 공포와 혐오감만 남겼다.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마오쩌둥에게 양웨이린의 소환을 건의했다. “양웨이린은 대사를 그르칠 극좌 분자다. 고질적인 조급증 환자다. 불필요한 난동으로 홍콩 정부의 탄압만 자초했다. 많은 당원이 등을 돌리고 지하조직만 노출했다. 비축해둔 당의 기력이 손상되고 홍콩에서 우리의 입지가 좁아졌다. 회복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양웨이린은 모든 책임을 4인방에게 뒤집어씌웠다. 홍콩을 떠날 때까지 자신의 독특한 방법을 바꾸지 않았다. 후임 왕쾅(王匡·왕광)은 유명한 기자 출신이었다. 전국의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글솜씨가 빼어났다. 방문 닫아걸고 고전에만 몰두했다. 본의 아니게 양웨이린과 똑같다는 소리를 들었다.
 
쉬자툰의 첫인상도 전임자들과 다를 바 없었다. 신문, 잡지 할 것 없이 비슷한 보도를 했다. “헝클어진 머리, 싸구려 셔츠와 꾸겨진 바지, 짙은 색안경 낀 행색이 영락없는 토종 공산당 간부 모습이었다. 농촌 전문가로 알려진 사람이 국제 금융중심지에서 무슨 괴상한 일 벌일지 우려된다. 홍콩에서 색안경은 범죄자들의 애용물 이다. 쉬자툰은 공산당 간부의 이미지를 훼손시켰다.”
 
쉬자툰의 회고도 소개한다. “그간 양복 입을 일이 없었다. 몇 차례 출국할 때도 중산복(中山服) 이면 충분했다. 1983년 춘제(春節) 앞두고 혈압이 올랐다. 의사가 중산복은 답답하니 양복 입으라고 권했다. 난징(南京)에서 난생처음 양복 한 벌을 샀다.  
  
쉬자툰, 취임하자마자 각계 인사 만나
 

양웨이린(왼쪽)은 국가주석 양상쿤(楊尙昆·오른쪽)과 친분이 두터웠다. 두 사람은 뒷마무리가 신통치 않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사진 김명호]

양웨이린(왼쪽)은 국가주석 양상쿤(楊尙昆·오른쪽)과 친분이 두터웠다. 두 사람은 뒷마무리가 신통치 않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사진 김명호]

모셔만 두고 입지는 않았다. 홍콩 부임 전날 광저우(廣州)에서 처음 입어봤다. 옆에 있던 부사장이 기겁했다. 동복이라며 당장 벗으라고 재촉했다. 거울을 보니 내가 봐도 흉했다. 동복은 그렇다 치더라도 맞지 않았다. 통은 넓고 단이 짧았다. 여름에 색안경 끼는 습관이 있었다. 광저우 역전에 노점이 즐비했다. 안경이 신기할 정도로 저렴하고 써보니 시원했다. 홍콩 도착 무렵 머리가 띵했다. 맥주병 깎아 만든 안경알이라 어쩔 수 없었다….”
 


쉬자툰은 역대 사장들과 딴판이었다. 노출을 꺼리지 않았다. 홍콩 도착 첫날 좌파 언론기구를 시찰했다. 둘째 날은 교육, 무역, 금융기관 둘러보고 각계 인사들을 찾아갔다. 이런 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했다. 기자들의 질문도 피하지 않았다. 백화점에 가서 양복과 넥타이도 샀다. 여직원들과 차 마시며 담소도 잊지 않았다. 유명 기업인의 병문안이나 영결식장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색안경 끼고 홍콩 총독도 방문했다.
 
활동 영역이 점점 확대됐다. 변두리 노동조합과 어촌마을 가서 밥 얻어먹고 노파들과 노래 부르며 춤도 췄다. 닫혀만 있던 분사 대문도 활짝 열었다. “홍콩의 민생과 민주에 관한 의견 듣고 싶다”며 홍콩대학 학생회 대표들을 초청했다. “신화통신 홍콩분사는 홍콩의 앞날에 관한 의견을 공개적으로 수집할 의무가 있다. 나는 우파의 활동을 보장하고,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희망하는 사람이다. 정견이 다른 것은 물론, 중국 공산당에 대한 비판도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다. 1개월간 학생들의 의견을 서면으로 보내주면 당 중앙에 전달하겠다.” 학생 대표들은 환호했다.
 
부임 2개월 후 쉬자툰은 당 중앙에 보고서를 보냈다. 홍콩의 특성을 몇 마디로 정리했다. “기업인은 돈벌이에 골몰하고, 지식인은 자유와 민주를 중요시하고, 하층민들은 생활이 개선되기를 희망하는 곳이 홍콩이다.” 홍콩의 대표적인 우파신문이 쉬자툰을 극찬했다. “그간 쉬자툰의 행적 지켜보며 여론을 청취했다. 민의를 존중하는 개방된 사람이라는 평가가 제일 많았다.” 맞는 말이다. 쉬자툰 개혁의 출발점은 개방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