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36〉 유엔기와 인공기 앞에서 정전협정 문서에 서명하는 미국대표 클라크(왼쪽 탁자)와 중·조연합군 수석대표 남일. 미군 3명, 북한 인민군과 중국지원군 각각 2명씩을 배석시킨 두 사람은 눈인사도 나누지 않았다. 외신기자 100여 명과 일본기자 10명이 운집했지만 한국기자는 최병우가 유일했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에 서 10시 12분 사이, 판문점. [사진 김명호] 6·25전쟁 정전회담은 세계 전쟁사상 기록을 세웠다. 개전에서 협정문서 서명까지 2년 하고도 17일이 더 걸렸다. 748일간, 회담하면서 싸우고, 싸우다가 또 마주했다. 승자와 패자의 만남이 아니다 보니, 회담이란 용어는 적합하지 않았다. 세계 최강의 미국과 한국전쟁 덕에 국제사회에 모습을 드러낸 신중국 간의 살벌한 담판이었다. 세계 최강 미국 vs 6·25로 뜬 중국 1951년 6월 30일 오전 8시(동경 시간), 리지웨이가 유엔군 총사령관 자격으로 김일성과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에게 “상부의 명을 받들어 귀 군에 통지한다”로 시작되는 전문을 보냈다. “나는 귀측이 한반도에서 진행 중인 모든 적대행위와 무력행동을 정지할 것을 토의하기 위한 회의를 원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대표를 파견해 귀측과 협의토록 하겠다. 회의 장소는 원산항에 정박 중인 덴마크 병원선을 제의한다.” 정전협정 조인 1개월 후 미군이 제공한 의복을 집어던지고 판문점으로 향하는 중국 지원군 포로들. [사진 김명호] 7월 1일, 김일성과 펑더화이도 조선인민군 총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사령관 명의로 답을 보냈다. “우리도 군사행동 정지와 평화 건립 담판에 동의한다. 귀측 대표와 만날 용의가 있다. 장소는 38선 이북의 개성지구를 건의한다. 동의하면 1951년 7월 10일부터 15일까지 우리 대표가 귀측 대표와 만날 준비를 하겠다.” 양측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전문을 주고받았다. 정전회담 북한 대표들과 함께한 중국지원군 대표단. 왼쪽 셋째부터 리커농, 지에팡, 덩화, 차오관화. 1951년 여름 개성. [사진 김명호] 정전회담 미국 측 수석대표 조이 제독은 공산당이라면 진저리를 쳤다. “담판에서 공산당의 행동이 어땠는지 묻는 사람이 많았다. 한마디로 전술과 책략 외에는 성의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단정해도 된다. 저들과 상대하려면 인내가 유일한 방법이다. 타협은 금물이다. 타협하는 순간 모든 것을 잃게 된다.”
|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제스 교육주권 선언…35세에 모교 교장 된 우이팡 (0) | 2020.08.08 |
---|---|
저우언라이 “우이팡은 모든 면에서 쑹메이링을 능가했다” (0) | 2020.08.01 |
문무 겸비한 전장의 사자 덩화 “전쟁도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 (0) | 2020.07.18 |
펑더화이 “지구전과 회담 통해 전쟁 끝내려 38선 견지한다” (0) | 2020.07.11 |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은 건 6·25전쟁 때문이었다 (0) | 2020.07.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