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35〉 덩화는 연합군의 재상륙작전을 두려워했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서해안 경계를 강화했다. [사진 김명호] 6·25전쟁 정전회담 중국 측 대표 덩화(鄧華·등화)는 중국지원군 2대 사령관이었다. 덩화 이후에도 양더즈(楊得志·양득지)와 양융(楊勇·양용), 두 명의 사령관이 있었다. 정전 2년 후인 1955년 9월 신중국 첫 번째 계급 수여식이 열렸다. 초대 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는 원수 계급에 국방부장까지 겸했다. 양더즈는 대 군구(軍區) 사령관만 20년 이상 지내고 덩샤오핑에게 총참모장 자리도 물려받았다. 양융은 베이징군구 사령관과 중앙서기처 서기까지 거쳤다. 미국인 설립 명문 중학에 다니며 덩화도 상장(上將) 계급은 받았다. 4년 남짓 역임한 선양(瀋陽) 군구 사령관을 끝으로 시야에서 사라지다시피 했다. 린뱌오(林彪·임표)와 펑더화이의 묘한 인간관계 때문이었다. 권위 있는 해석을 소개한다. 덩화는 횡성전투를 직접 지휘했다. 1951년 2월 중순 횡성 인근. [사진 김명호] “항미원조 전쟁 초기, 덩화가 마오쩌둥에게 보고차 귀국한 적이 있었다. 업무를 마친 덩화는 옛 상관 린뱌오를 잊지 않았다. 역으로 가는 도중 시간을 냈다. 린뱌오는 꼼꼼하고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다. 전선 상황을 상세히 물었다. 부관에게 점심을 준비하라는 지시도 했다. 열차 시간이 촉박한 덩화는 초조했다. 용기를 내서 빨리 떠나야 한다는 말을 해버렸다. 린뱌오의 안색이 변했다. 덩화를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 나가라는 의미였다. 항일전쟁과 국·공전쟁 시절 린뱌오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던 덩화는 린뱌오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전선 사정이 급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지만,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린뱌오는 평소 우습게 알던 펑더화이 따라 조선에 가더니 나를 가볍게 본다며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1959년 펑더화이는 마오에게 한 방 날리고 실각했다. 신임 국방부장 린뱌오가 펑더화이 추종자들을 추려냈다. 펑더화이의 측근으로 분류된 덩화도 덩달아 화를 입었다. 북한 내무상 박일우의 방문을 계기로 기념사진을 남긴 중국 항미원조 지휘부, 왼쪽부터 부참모장 왕정주, 정치부 비서장 리정, 리정의 남편인 정치공작 담당 간스치, 박일우, 펑더화이, 천껑, 덩화. [사진 김명호] 소년 덩화의 꿈은 법률가였다. 17세 때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의 법정학교에 합격했다. 친구 따라 공산당 비밀집회에 갔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입당을 자청했다. 얼마 후 사달이 났다. 1950년 2월 14일, 중·소 양국의 협의로 뤼순커우(旅順口)에 주둔하던 소련 해군 철수안에 서명하는 덩화. [사진 김명호] 판문점회담에 덩화와 함께 참여한 지에팡(解方·해방)은 정전 2년 후 소장 계급을 받았다. 원수 계급장 받은 펑더화이가 발끈했다. “지에팡은 지원군 참모장이었다. 참모장이 소장이면 사령관인 나는 중장이 마땅하다”며 전화통을 집어 던졌다. 저우언라이가 겨우 진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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