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

저우언라이 “우이팡은 모든 면에서 쑹메이링을 능가했다”

bindol 2020. 8. 1. 08:23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37〉 ‘지혜의 여신’ 우이팡

진링여자대학 교장 우이팡은 1945년 4월 2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엔선포식에 중국 대표로 참석했다. 유엔헌장(聯合國憲章)에 서명하는 우이팡. [사진 김명호]

1985년 11월 1일, 중앙정치국원 시중쉰(習仲勛·습중훈)과 전인대 부위원장 펑충(彭沖·팽충)이 난징(南京)을 방문했다. 장수(江蘇)성 서기와 성장을 대동하고 난징대학 부속병원을 찾았다. 입원 중인 노년의 우이팡(吳貽芳·오이방)과 생애 마지막 작별을 나눴다. 병원에 진풍경이 벌어졌다.

중국 여성 교육 선구자 타계하자
대륙 각지, 미국서도 날아와 애도

17세 때 부모·형제 갑자기 잃어
이모부 천수퉁, 친자식처럼 키워

베이징서 영어 교사로 일하다
학교 측 간청으로 진링여대 입학

미국에서 날아온 50·60대 여성과 전국 각지에서 달려온 여교수와 연구원들이 연일 병실 복도를 메웠다. 11월 10일 오전, 전 ‘진링(金陵)여자대학’ 교장(총장) 우이팡이 93년간의 비바람을 뒤로했다. 유명인사들의 회고가 줄을 이었다. 진링이 배출한 여류 화학자가 9년 전 세상 떠난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의 회상을 소개했다.

유엔헌장에 서명한 유일한 중국 여성

1954년 9월 27일 전인대 1차 회의에서 투표하는 천수퉁. 대표들은 무기명 투표에서 천수퉁을 상무부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사진 김명호]

총리 저우언라이는 인재를 같은 편으로 만드는 능력이 탁월했다. 실패하면 장탄식하며 땅을 쳤다. 우이팡을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과 함께 거론한 적이 있다. “우이팡을 볼 때마다 기쁘고 즐거웠다. 우리 당에 저런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국·공합작 시절 입당을 권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때 쑹메이링의 기질과 재능에 탄복한 적이 있었다. 우이팡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모든 면에서 쑹을 능가했다. 원로 천수퉁(陳叔通·진숙통)과 루스벨트는 혜안이 있었다. 천 선생은 우이팡에게 학문의 길을 열어줬다.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지혜의 여신’이라 불렀다. 가장 정확한 표현이다.”

우이팡의 이름 앞에는 최초, 유일, 가장이라는 수식어가 평생 붙어 다녔다. 중국 최초의 여대 입학생이고 여대 교장이었다. 유엔헌장에 서명한 유일한 중국 여성이고, 가장 근엄하고 숭고한, 융통성 많은 교육자였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와 쑹메이링이 직접 제의한 부장(장관)직도 교육 외에는 관심이 없다며 두 차례나 거절했다. 평소 자신에 관한 얘기를 자제했지만 늘그막에 소녀 시절 얘기를 남긴 적이 있다.

“나는 1893년 1월 26일, 1주일간 내린 폭우로 프랑스 파리가 물바다로 변한 바로 그 날, 우한(武漢)의 세무관리 집안에서 태어났다. 12살 때부터 언니와 함께 상하이(上海)와 수저우(蘇州)의 영어학교에 다녔다. 하루는 속히 돌아오라는 모친의 급전을 받고 부모가 있는 우한행윤선을 탔다. 배 안에서 이모부 천수퉁을 만났다. 이모부는 평소와 달랐다. 침통한 표정 지으며 우리를 피했다. 우리가 보채자 아버지가 강물에 투신했다는 얘기를 해줬다. 장례를 마친 모친은 오빠와 언니 동생을 데리고 친정 항저우(杭州)로 갔다. 외할머니는 우리를 끌어안고 통곡했다. 나는 학교가 그리웠다.”

1923년 9월, 신축교사 앞에서 포즈를 취한 진링여자대학 신입생. 우이팡은 5년 후 교장으로 부임했다. [사진 김명호]

1911년 10월, 쑨원(孫文·손문)의 추종자들이 우한에서 혁명군 깃발을 내걸었다. 우이팡 일가는 상하이로 이주했다. 국제도시의 거리를 총성에 놀란 피난민들이 메웠다. 어딜 가나 인산인해였다. 칭화대학에 재학 중이던 오빠는 미국 유학이 수포로 돌아가자 절망했다. 인간세상이 싫었던지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황푸(黃浦)강에 몸을 던졌다. 남편 사망 후 시름시름 앓던 모친은 아들 사망에 충격을 받았다. 3주 후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비극은 계속됐다. 모친의 시신을 지키던 언니가 우이팡이 잠들자 옆방에서 제 손으로 목을 맸다.

한 달도 안 된 사이에 오빠, 엄마, 언니를 잃은 17세 소녀는 갈 곳이 없었다. 동생 손 잡고 이모부 천수퉁을 찾아갔다. 이모부는 우이팡을 안심시켰다. “나는 너처럼 눈이 맑은 애를 본 적이 없다. 오늘부터 너와 나는 부녀지간이다.” 부탁도 했다. “전족을 풀어라.” 우이팡은 고개를 저었다. “엄마가 정성을 다해 만들어준 선물입니다. 불편해도 영원히 간직하겠습니다.” 천수퉁은 “네 말이 맞다. 너야말로 내 골육(骨肉)”이라며 눈물을 훔쳤다.

천수퉁은 조카의 조용하고 강인한 성품을 높이 샀다. 미국 침례교에서 항저우에 설립한 홍다오(弘道)여중 교장에게 붓으로 쓴 영문 편지를 보냈다. “어린 나이에 온갖 액운과 고통을 겪은 여자애가 있다. 나는 훗날 이 애가 ‘자유를 누리며 규정을 존중하는 청소년’을 배양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엄한 단련을 감히 청한다.” 선교사의 딸로 항저우에서 태어난 교장은 중국이 어떤 나라인지 잘 알았다. 청나라 말기 대과(大科) 급제자이며 혁명세력도 인정한 대지식인을 중국의 전통적인 방법으로 예우했다. 안부 묻는 정중한 편지로 우이팡의 입학 통보를 대신했다. 우이팡은 천수퉁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온갖 액운과 고통 겪어”

진링여자대학 개교 초기의 수업광경. [사진 김명호]

1914년 겨울, 천수퉁 일가는 베이징으로 이주했다. 우이팡은 베이징 여자사범학교와 부속 초등학교에서 1년간 영어교사를 했다. 첫 월급으로 천수퉁의 안경과 단장을 샀다. 이듬해 겨울, 홍다오여중 시절 미국 역사 강의하던 여교사의 편지를 받았다. 난징의 우이팡기념관(貽芳園) 자료실에 있는 서신 내용을 소개한다.

 



“나는 1913년에 설립한 진링여자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금년 가을 정식 개교와 함께 여학생 11명이 입학했지만 7명은 2개월 만에 학업을 포기했다. 교직원 6명 중 2명이 중국인이고 나머지는 미국 국적이다. 홍다오여중 재직 시 너의 단정함과 꼿꼿한 자세는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우리 교직원들의 의무는 장차 이 대학 이끌 중국 여학생 발굴이다. 너의 입학을 간청한다.” 우이팡은 주저했다. 학비 때문이었다. 천수퉁과 이모는 조카를 격려했다. “너는 결정만 하면 된다. 우리는 너를 지지한다.”

대학 측은 우이팡을 위해 2개월간 특별반을 개설했다. 여름에 1학년 과정 시험에서 전과목 거의 만점을 받았다. 2학년이 된 1회 입학생 4명과 합류했다. 입학 초기만 해도 불행한 가정사의 음영을 털어버리지 못했던 우이팡은 영어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암송하기까지 18개월이 걸렸다. 꿈 같은 대학 생활이 시작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