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37〉 ‘지혜의 여신’ 우이팡 진링여자대학 교장 우이팡은 1945년 4월 2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엔선포식에 중국 대표로 참석했다. 유엔헌장(聯合國憲章)에 서명하는 우이팡. [사진 김명호] 1985년 11월 1일, 중앙정치국원 시중쉰(習仲勛·습중훈)과 전인대 부위원장 펑충(彭沖·팽충)이 난징(南京)을 방문했다. 장수(江蘇)성 서기와 성장을 대동하고 난징대학 부속병원을 찾았다. 입원 중인 노년의 우이팡(吳貽芳·오이방)과 생애 마지막 작별을 나눴다. 병원에 진풍경이 벌어졌다. 중국 여성 교육 선구자 타계하자 미국에서 날아온 50·60대 여성과 전국 각지에서 달려온 여교수와 연구원들이 연일 병실 복도를 메웠다. 11월 10일 오전, 전 ‘진링(金陵)여자대학’ 교장(총장) 우이팡이 93년간의 비바람을 뒤로했다. 유명인사들의 회고가 줄을 이었다. 진링이 배출한 여류 화학자가 9년 전 세상 떠난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의 회상을 소개했다. 1954년 9월 27일 전인대 1차 회의에서 투표하는 천수퉁. 대표들은 무기명 투표에서 천수퉁을 상무부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사진 김명호] 총리 저우언라이는 인재를 같은 편으로 만드는 능력이 탁월했다. 실패하면 장탄식하며 땅을 쳤다. 우이팡을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과 함께 거론한 적이 있다. “우이팡을 볼 때마다 기쁘고 즐거웠다. 우리 당에 저런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국·공합작 시절 입당을 권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때 쑹메이링의 기질과 재능에 탄복한 적이 있었다. 우이팡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모든 면에서 쑹을 능가했다. 원로 천수퉁(陳叔通·진숙통)과 루스벨트는 혜안이 있었다. 천 선생은 우이팡에게 학문의 길을 열어줬다.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지혜의 여신’이라 불렀다. 가장 정확한 표현이다.” 1923년 9월, 신축교사 앞에서 포즈를 취한 진링여자대학 신입생. 우이팡은 5년 후 교장으로 부임했다. [사진 김명호] 1911년 10월, 쑨원(孫文·손문)의 추종자들이 우한에서 혁명군 깃발을 내걸었다. 우이팡 일가는 상하이로 이주했다. 국제도시의 거리를 총성에 놀란 피난민들이 메웠다. 어딜 가나 인산인해였다. 칭화대학에 재학 중이던 오빠는 미국 유학이 수포로 돌아가자 절망했다. 인간세상이 싫었던지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황푸(黃浦)강에 몸을 던졌다. 남편 사망 후 시름시름 앓던 모친은 아들 사망에 충격을 받았다. 3주 후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비극은 계속됐다. 모친의 시신을 지키던 언니가 우이팡이 잠들자 옆방에서 제 손으로 목을 맸다. 진링여자대학 개교 초기의 수업광경. [사진 김명호] 1914년 겨울, 천수퉁 일가는 베이징으로 이주했다. 우이팡은 베이징 여자사범학교와 부속 초등학교에서 1년간 영어교사를 했다. 첫 월급으로 천수퉁의 안경과 단장을 샀다. 이듬해 겨울, 홍다오여중 시절 미국 역사 강의하던 여교사의 편지를 받았다. 난징의 우이팡기념관(貽芳園) 자료실에 있는 서신 내용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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