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

‘동북군 제갈량’ 지에팡 대표 “한 손은 전쟁, 다른 손은 정전회담”

bindol 2020. 8. 1. 08:19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36〉

유엔기와 인공기 앞에서 정전협정 문서에 서명하는 미국대표 클라크(왼쪽 탁자)와 중·조연합군 수석대표 남일. 미군 3명, 북한 인민군과 중국지원군 각각 2명씩을 배석시킨 두 사람은 눈인사도 나누지 않았다. 외신기자 100여 명과 일본기자 10명이 운집했지만 한국기자는 최병우가 유일했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에 서 10시 12분 사이, 판문점. [사진 김명호]

6·25전쟁 정전회담은 세계 전쟁사상 기록을 세웠다. 개전에서 협정문서 서명까지 2년 하고도 17일이 더 걸렸다. 748일간, 회담하면서 싸우고, 싸우다가 또 마주했다. 승자와 패자의 만남이 아니다 보니, 회담이란 용어는 적합하지 않았다. 세계 최강의 미국과 한국전쟁 덕에 국제사회에 모습을 드러낸 신중국 간의 살벌한 담판이었다.

세계 최강 미국 vs 6·25로 뜬 중국
전쟁사 기록 세운 748일간의 담판

지에팡 대표 “남한은 백선엽 한 명
회담 임하는 미국 속내 알 만했다”

미국 측 수석 대표 조이 제독
“공산당과 타협하면 모든 걸 잃어”

1951년 6월 30일 오전 8시(동경 시간), 리지웨이가 유엔군 총사령관 자격으로 김일성과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에게 “상부의 명을 받들어 귀 군에 통지한다”로 시작되는 전문을 보냈다. “나는 귀측이 한반도에서 진행 중인 모든 적대행위와 무력행동을 정지할 것을 토의하기 위한 회의를 원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대표를 파견해 귀측과 협의토록 하겠다. 회의 장소는 원산항에 정박 중인 덴마크 병원선을 제의한다.”

펑더화이 “상대 위계에 안 넘어가고 성공”

정전협정 조인 1개월 후 미군이 제공한 의복을 집어던지고 판문점으로 향하는 중국 지원군 포로들. [사진 김명호]

7월 1일, 김일성과 펑더화이도 조선인민군 총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사령관 명의로 답을 보냈다. “우리도 군사행동 정지와 평화 건립 담판에 동의한다. 귀측 대표와 만날 용의가 있다. 장소는 38선 이북의 개성지구를 건의한다. 동의하면 1951년 7월 10일부터 15일까지 우리 대표가 귀측 대표와 만날 준비를 하겠다.” 양측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전문을 주고받았다.

6·25전쟁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참전국이 가장 많았다. 한정된 좁은 땅덩어리를 벗어난 적이 없는 국제전이다 보니 별일이 다 벌어졌다. 회담장도 전장과 한동네나 마찬가지였지만 정전회담에 대한 중국과 미국의 회상은 천양지차였다. 보는 시각이 달랐다. 중국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는 조카에게 구술을 남겼다. “조선은 복잡한 나라다. 정전담판 과정 중 우리 대표들은 상대방의 음모와 위계에 넘어가지 않았다. 담판에 성공한 결과, 장차 조선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남측 대표 배제를 암시한, 우리에겐 섬뜩한 내용이었다.

정전회담 대표였던 중국지원군 참모장 지에팡(解方·해방)은 협상에 능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동북군의 제갈량이었다. 정전회담에서 북한 측에 많은 조언을 했다. 정전담판 회상을 소개한다. “미군은 전장에서 얻은 것이 없자 담판을 통해 뭔가 얻으려 하는 눈치였다. 우리 측 수석대표가 남일 대장이었지만 상대 측 대표는 미군들이었다. 남한 측에서는 젊고 능수능란한 백선엽 소장 한 명만 발언권 없는 연락관으로 참석한 것 보고 미군의 속내를 알 만했다. 우리는 두 손을 활용했다. 한 손으로는 전쟁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회담했다. 두 손을 적절히 배합하며 지혜를 짜냈다. 우리 뒤에는 젊은 준재와 보기만 해도 든든한 리커농(李克農·이극농) 동지와 차오관화(喬冠華·고관화) 동지가 있었다. 회담 첫날 수석대표 남일 대장은 차오관화 동지가 밤새 쓴 원고를 토씨 하나 빼지 않고 읽었다.”

지에팡의 술회는 사실이었다. 송악산 남록의 구릉지대 은밀한 곳에 각 기관에서 차출된 젊은 인재들이 우글거렸다. 하버드 대학에서 경제학 학위를 마친 훗날의 사회과학원 대학원 원장 푸산(浦山·포산)과 유엔 대사 링칭(凌靑·릉청)은 직접 군 계급장 달고 회담에 참석했다. 20여 년 후, 셰익스피어 연구와 극본 주석으로 명성을 떨친 치우커안(裘克安·구극안)은 지에팡의 통역 노릇을 했다. 지에팡의 현란한 몸짓과 품위 넘치는 언어를 생동감 있게 전달해 리커농의 칭찬을 받았다. 외국 언론도 “중국은 큰 나라다. 별사람이 다 있다”며 치우커안의 재능을 보도했다. 키신저의 중국 방문에 한몫을 담당한 지자오주(冀朝鑄·기조주)는 당시 21세로 제일 어렸다.

조이 제독 “공산당, 전술·책략 외 성의 없어”

정전회담 북한 대표들과 함께한 중국지원군 대표단. 왼쪽 셋째부터 리커농, 지에팡, 덩화, 차오관화. 1951년 여름 개성. [사진 김명호]

정전회담 미국 측 수석대표 조이 제독은 공산당이라면 진저리를 쳤다. “담판에서 공산당의 행동이 어땠는지 묻는 사람이 많았다. 한마디로 전술과 책략 외에는 성의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단정해도 된다. 저들과 상대하려면 인내가 유일한 방법이다. 타협은 금물이다. 타협하는 순간 모든 것을 잃게 된다.”

 



판문점 담판 대표단 2인자였던 두핑(杜平·두평)은 미국을 비난했다. “우리의 적은 전쟁 중후반부터 패배를 거듭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회담을 제안했다. 실패를 인정할 줄 모르고 평등한 관계에서 협상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승리라도 한 것처럼 무리한 요구를 계속했다. 국제법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전쟁을 통해 기를 꺾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강하게 나오면 우리는 더 강하게 대응했다.”

1953년 7월 27일, 220평 간이건물에서 미국대표와 공산 측 대표 사이에 정전협정 조인식이 열렸다. 당사국을 제쳐놓은 괴상한 의식은 12분 만에 끝났다. 대표들끼리 악수는커녕 기념사진도 남기지 않았다. 당사국 대한민국이 빠진 회담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