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1년 5월 일본을 방문 중이던 러시아의 니콜라이 황태자가 시가(滋賀)현 오쓰(大津)에서 습격을 당해 부상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칼을 빼들어 황태자에게 달려든 범인은 놀랍게도 경비 담당 경찰관 쓰다 산조(津田三蔵)였다. 일본은 초강대국 러시아의 차기 황제 방문 의전에 심혈을 기울이던 차였다. 그런 국빈을 자국 관헌이 습격했다는 소식에 일본 전역이 발칵 뒤집힌다. 소식을 들은 왕비는 혼절했고 메이지 국왕은 한달음에 교토행 기차에 올라 병문안에 나섰다.
내각 수뇌부는 범인을 사형에 처하여 러시아의 보복을 막고자 노심초사했다. 이때 내각의 구상에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 대심원장 고지마 이켄(兒島惟謙)이었다. 고지마는 내각이 사형의 근거로 삼은 형법상 '대역죄'는 일본 왕실이 아닌 외국 왕족에게는 적용되지 아니하므로 사인(私人) 간 '모살미수죄'가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살미수죄의 최대 형량은 무기징역이었다. 내각의 집요한 압박에도 고지마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사건 2주 후 개최된 재판에서 재판부는 모살미수죄를 적용하여 쓰다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다. 이 판결은 일본 사법부가 '정치로부터의 독립'을 관철시킨 상징적 재판으로 일본 법조 역사에 남았다. 반면 이 재판을 통해 새로운 문제도 노정되었다. 고지마는 재판부의 일원이 아니었으나 대역죄 적용 불가 의견을 노골적으로 피력하였고, 이는 사법부 내부적으로도 담당 이외의 재판에 간여해서는 안 된다는 '재판의 독립'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130년 전 쓰다 재판이 남긴 '정치로부터의 독립'과 '재판의 독립'은 삼권분립, 법치주의의 근간으로 지금도 사법부 구성원들에게 각인되어 있다. 일본의 사법 제도가 제국주의 통치 기구로 기능하는 경험을 한 한국으로서는 복잡한 심정일 것이나, 사법 독립을 근대국가의 요체(要諦)로 삼아 치열한 고민과 실천을 거듭한 사법부의 전통이 국민의 신뢰를 얻고 사회를 지탱하는 기둥이 되고 있는 사정은 귀감으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