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세설신어

[정민의 世說新語] [247] 요동백시(遼東白豕)

bindol 2020. 8. 2. 05:53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에도 시대 일본의 유학자 라이산요(賴山陽·1780~1832)의 전집을 살펴보는데 '춘추요시록(春秋遼豕錄)'이라는 재미난 책 이름이 나온다. 라이산요가 '춘추'에 대해 강의한 것을 문하 제자들이 정리한 내용이다. 책 말미에 붙은 그의 발문을 보니 당시 경학 공부의 네 가지 병통을 지적했다. 첫째는 빙주(憑注)로, 경서의 본문은 안 읽고 주석부터 읽는 폐단이다. 둘째는 영주(佞注)니, 주석에 아첨해서 내용이 어긋나면 도리어 경전 본문을 뜯어 고치려 드는 폐단이다. 셋째는 구주(仇注)로, 남의 주석을 따져보지도 않고 원수 삼아 다퉈볼 궁리뿐인 태도다. 넷째는 역어주(役於注)니, 뭔가 새로운 주장을 내세워 보려고 예전의 온갖 주석을 다 끌어모아 늘어놓는 수작이다. 이런 폐단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가지다.

라이산요는 옛 사람이 이미 다 말했겠지만 내가 미처 못 보았을 수가 있고, 생각이 같은 것을 알게 되는 것도 의미가 있으므로 중복을 무릅쓰고 이 책을 짓노라고 썼다. 그래서 붙인 제목이 요시록(遼豕錄), 즉 요동 돼지의 기록이란 요상한 제목이다. 물론 요동 돼지는 연원이 있다. 옛날에 요동에서 멧돼지가 새끼를 낳았는데 머리가 흰 놈이 나왔다. 특별한 종자라고 여긴 야인이 조정에 진상하려고 이것을 안고 하동(河東)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가다 보니 하동 땅의 돼지는 온통 흰 놈뿐이지 않은가? 고작 머리 흰 것을 신기하게 여긴 자신이 부끄러워 기운이 빠진 그는 그만 되돌아오고 말았다. 이것이 유명한 요동백시(遼東白豕)의 사연이다. '문선(文選)'에 실린 주부(朱浮)의 '여팽총서(與彭寵書)'에 나온다.

라이산요가 책 제목을 이렇게 붙인 것은 남이 보 면 요동 돼지 꼴이라 우스울 테지만 나는 그래도 본문에 충실하고 다른 사람의 주석을 곱씹은 바탕 위에서 종래 내 말을 하려고 애썼다는 의미다. 이것도 안 읽었느냐는 식의 비방을 막는 동시에 은근히 자기식 독법의 자부를 드러낸 절묘한 표제였다. 학문은 제 말 하자고 하는 것인데 이 눈치 저 눈치 보느라 죽도록 내 말은 한마디도 못하고 마는 것은 슬픈 일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1/28/201401280404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