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세설신어

[정민의 世說新語] [242] 몽롱춘추(朦朧春秋)

bindol 2020. 8. 2. 05:51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박지원이 '열하일기' 피서록에서 최성대(崔成大·1691~?)의 '이화암노승가(梨花菴老僧歌)'의 두 구절을 인용했다. "오왕(吳王)이 연극 보다 상투 보고 울었고, 전수(錢叟)는 머리 깎고 사필(史筆)에 의탁했지(吳王看戲泣椎結, 錢叟爲僧托麟筆)." 오왕은 오삼계(吳三桂)다. 청에 투항해 명 멸망에 조력한 후 제 욕심을 채우려고 다시 난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전수는 전겸익(錢謙益)이다. 청조에 투항해서 자청해 머리를 깎았던 훼절의 인물이다. 최성대는 절의를 말할 가치조차 없는 두 인물을 두고, 오삼계는 명대의 상투 머리를 한 연극 무대 위 인물을 보고 옛 감개에 젖어 눈물을 흘리고, 전겸익은 머리는 비록 깎았지만 속으로는 춘추의 사필(史筆)을 휘둘러 명나라 역사를 서술했다고 치켜세웠다.

명을 배반해 오랑캐에게 나라를 팔아넘긴 자가 연극배우의 상투를 보고 울었다니 그런 코미디가 없다. 제 머리 깎아 절의를 꺾은 자가 춘추의 필법을 말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박지원은 "우리 속담에 사물에 어두운 것을 '몽롱춘추(朦朧春秋)'라 한다.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춘추'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나 몽롱하기가 이러한 종류와 같은 것이 많으니, 어찌 만인(滿人)들의 조소를 입지 않겠는가?" 하며 답답해했다. 제법 그럴 법해 보여도 따져 보면 전혀 동이 닿지 않는 말이다. 제 딴에는 제법 유식한 체 한 소리가 앞뒤 맥락이 없어 우습다.

춘추의 필법은 엄정했다. 허투루 보이는 동사 하나도 상황에 따라서 가려 썼다. 한 예로 군대의 싸움도 세력이 비등하면 공(攻), 강자가 약자를 치면 벌(伐), 잘못을 응징함은 토(討), 천자가 나선 전쟁은 정(征)으로 구분하는 식이다. 정벌과 토벌, 공벌, 정토의 뜻도 제가끔 다르다. 의미로는 모두 친다는 뜻이지만 표현만 봐도 전쟁의 성격이 드러났다.


기준은 명분이다. 명분이 무너져 분간이 흐려지면 그게 바로 몽롱춘추다. 꼭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구분 못하면 세상이 그 틈에 어지러워진다. 해야 할 일은 안 하고 안 해야 할 일을 하면 망조가 든다. 분간을 세우는 것이 먼저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12/24/201312240361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