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리(李德履·1728~?)는 1776년 정조 즉위 직후 진도에 유배 왔다. 불과 두 해 전 종2품 오위장(五衛將)의 신분으로 창경궁 수비의 총책임을 맡았던 그는 결국 진도 유배지에서 근 20년 가까운 유배 생활 끝에 비운의 생을 마친 듯하다.
그의 시문집 '강심(江心)'에 '실솔부(蟋蟀賦)', 즉 '귀뚜라미의 노래'란 작품이 있다. 그는 진도 통정리(桶井里)의 귀양지에서 거북 등처럼 갈라진 흙벽 틈에서 밤낮 우는 귀뚜라미 소리를 들었다. 그 절망의 시간을 그는 이렇게 토로했다. "마음이 꺾이고 뜻이 무너지자 멍하니 식은 재 위에 오줌을 눈 것처럼 다시는 더운 기운이 없었다. 또 어찌 능히 귀뚜라미가 혼자 울다 혼자 그치면서 스스로 그 즐거움을 즐기는 것만 같겠는가?"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절망의 나락 속에 밀어 넣는 대신 그 골방 안에서 국방 시스템에 관한 놀라운 제안을 담은 '상두지(桑土志)'를 저술했고, 그 재원 마련을 위해 중국과의 차무역 구상을 제시한 '동다기(東茶記)'를 지었다. 다산은 그의 저술을 보고 놀라 자신의 '경세유표'에 인용했고, 초의는 '동다송'에 '동다기'를 끌어와 자기 주장의 근거로 내세웠다. 다산의 19년 유배 못지않게 이덕리의 긴 유배도 빛저운 성과를 남겼다.
금번에 국빈 방문을 하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토굴사관(土窟四關) 기사가 인상적이다. 부총리의 장남으로 '베이징 도련님'이었던 그는 부친의 갑작스러운 실각으로 16세 때 황토 고원의 양자허(梁家河) 토굴로 쫓겨가 7년간 살았다. 귀하게만 자란 여드름투성이의 소년이 토굴 생활에서 넘어 야 했던 네 가지 관문은 벼룩과의 사투, 거친 잡곡밥, 고된 작업량,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사상 개조 등이었다고 그는 뒤에 술회했다. 20여년 뒤 그곳을 다시 찾아 당시 주민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 속의 표정에는 역경을 이겨낸 사람의 깊이와 자신감이 느껴진다. 못 견딜 가혹한 시련도 어떤 사람에게는 그저 좌절과 절망의 시간이 아닌 창조와 향상의 시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