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아문화사에서 펴낸 '범어사지(梵魚寺誌)'를 읽는데 마지막 면에 인장이 한 과 찍혀 있고 옆에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1864~1953) 선생의 글이 적혀 있었다. 사연이 자못 흥미로웠다.
범어사 부근에 원효 스님의 유지(遺址)가 있었다. 1936년 이곳에 공사를 하면서 땅을 파다가 두 길 깊이에서 해묵은 옥인(玉印) 하나가 출토됐다. 본래 철합(鐵盒)에 넣었던 것인데 오랜 세월에 합은 다 삭고 옥인만 남은 상태였다. 인장에는 아홉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크게 가르침의 그물을 펼쳐 인천(人天)의 물고기를 낚는다(張大敎網 漉人天之魚)." 가르침의 그물을 크게 펼쳐 미망(迷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중생을 모두 제도(濟度)하라는 뜻이다.
원효의 천년 성지 땅속 깊은 곳에서 쇠로 만든 상자가 다 삭아내려 흔적도 찾기 어려운 시간 속에서도 옥인은 그 모습을 변치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중생 제도의 서원은 삭지도 않고 삭을 수도 없었던 것일까?
그해 백용성(白龍城·1864~1940) 스님은 동산(東山·1890~1965) 스님에게 계맥을 전수하는 정전옥첩(正傳玉帖)에서 "해동 초조(初祖)의 보인(寶印)을 정법안장(正法眼藏)의 신표로 주노니 잘 지녀 끊어지지 않도록 하라"며 이 옥인을 내렸다. 동산은 이를 허리에 차고 한시도 몸에서 떼지 않았다 한다. 동산 스님이 서울에 왔다가 속가의 고모부인 위창 선생을 찾아 가 옥인을 지니게 된 내력을 들려주었다. 위창은 감탄하며 그 옥인에 인주를 듬뿍 묻힌 후 정성스레 자신의 인전지(印箋紙)에 찍었다. 그리고 전후 사연을 적어 두 구절의 시와 함께 써 주었다. "옥돌이 삭지 않아 어보(魚寶)를 받쳐내니, 허리에 찬 작은 인장 천년의 고험(攷驗)일세(土花不蝕漉魚寶 腰間小鑈爾千年攷)."
동산 스님은 옥인을 찬 채 '서리 솔의 맑은 절조, 물 위 달의 텅 빈 마음(霜松潔操 水月虛襟)' 같은 맵고 맑은 정신으로 성철 스님 같은 근세의 선지식들을 무수히 길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