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면 물이 풀린다. 차가운 기운을 잔뜩 머금었던 흙에서, 그리고 바위에서 물은 조금씩 풀려 땅을 적신다. 그저 순우리말로 ‘봄물’이라 표현하면 딱 좋다. 그에 상응하는 한자 낱말이 춘수(春水)다. 이 말로 사람들의 심금을 크게 울린 이가 있다. 오대십국(五代十國) 때 남당(南唐)의 마지막 군주 이욱(李煜)이다. 그는 북송(北宋)에 패망해 포로로 잡혀 3년을 버틴다. 나라를 잃은 설움, 포로로 적에게 잡혀 갇혀 지내던 세월의 포한(抱恨)은 결국 그의 천재적인 문학적 재능에 올라타 천고의 유명 시문으로 거듭 태어난다. 악곡(樂曲)에 가사를 매기는 식의 창작인 사(詞)의 형식이다. 그 신세가 오죽 답답했을까. 그는 작품에서 덧없는 세월, 다시 맞이하는 봄의 바람, 절망감으로 바라볼 수조차 없는 고향 쪽 밤하늘, 예전 살았던 궁궐을 차례로 회고하다가 문득 “슬픔은 얼마나 클까”라고 자문한다. 이어 나온 구절이 천하의 명구다. “恰似一江春水向東流(마치 동쪽으로 흐르는 온 강의 봄물일 듯).” 一(일)은 여기서 ‘하나’의 뜻이 아니다. 시작과 끝을 모두 일컫는다. 전체, 모두, 온의 뜻이다. 게다가 아직은 차가운 봄물, 춘수(春水)의 이미지를 덧댔다. 봄물은 얼었던 대지로부터 풀려 골짜기와 작은 시내를 거쳐 강에 이른다. 그런 큰 강에 겨울 내내 추위에 묶였던 물이 모이면 아주 도저한 흐름을 이룬다. 마지막 구절의 一江(일강)이라는 표현이 멋지다. 제 근심과 걱정, 슬픔의 크기를 빗댄 말로는 그야말로 압권에 해당한다. 온 강에 불어난 봄물이 마냥 동쪽으로 흘러 멀어지는 모양이다. 강에 슬픔과 원망을 던져버리는 한자(漢字)세계의 정서도 매우 그럴듯하다. 담담하지만 마음속에서 한없이 커진 비감(悲感)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표현이다. 청와대를 나와 이제 법의 심판대에 선 박근혜 전 대통령의 심경이 그럴까. 그럴 수 있다. 최고의 권력을 허망하게 잃고 초라한 혐의자로 전락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독선과 아집, 불통으로 만든 지금 나라꼴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심경은 훨씬 더 하다. 차가운 봄물이 강을 채워 흘러가듯 걱정과 우려, 불안과 초조가 마음이나 뇌리에 가득하기만 하다. 유광종 중국인문 경영연구소 소장 ykj3353@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