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무(李德懋)가 이서구(李書九)에게 쓴 편지에 "옛날에 용서(傭書)로 책을 읽은 사람이 있다길래 내가 너무 부지런하다고 비웃은 적이 있었소. 이제 갑자기 내가 그 꼴이라 거의 눈이 침침하고 손에 굳은살이 박일 지경이구려. 아! 사람이 진실로 스스로를 요량하지 못하는 법이오"라고 쓴 것을 보았다.
이때 용서는 책을 빌려 읽는 것이 아니라 돈을 받고 남을 위해 책을 베껴 써주는 것을 말한다. 용(傭)은 품팔이의 뜻이다. 이덕무가 이서구에게 보낸 다른 편지에서 "그대가 내게 장서(藏書)를 맡겨 베껴 쓰고 교정 보고 평점까지 맡기려 한다는 말을 듣고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소"라고 쓴 것을 보면 그가 젊은 시절 용서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나갔던 딱한 형편이 짐작된다. 이런 내용도 있다. "새해인데 사람은 점점 묵어지니 군자는 마땅히 명덕(明德)에 힘써야 할 것이오. 창문의 해가 따스해 벼루의 얼음이 녹으니(窗日暄而硏氷釋) 예전 일과를 되찾고자 하오. '전당시(全唐詩)'를 차례로 보내주면 좋겠소." 글씨 쓸 거리를 달라는 얘기다. 벼루의 얼음 녹는 소리가 눈물겹다.
이덕무의 손자 이규경(李圭景)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중 '초서변증설(鈔書辨證說)'에서 이렇게 썼다. "내 할아버지 되시는 청장공(靑莊公·이덕무의 호)께서는 직접 책 몇 천 권을 베껴 쓰셨다. 파리 대가리만 한 가느다란 해서로 육서(六書)의 서법에 따라 써서 한 글자도 속된 모양새가 없었다. 정조 임금 시절 왕명을 받들어 책을 편집할 때 내부(內府)에 남은 조부의 필적 또한 백여 책 분량이 더 될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책을 베껴 쓰기 시작한 이래로 이처럼 대단한 예는 없었다." 갑자기 규장각 책장 어딘가 에 끼어 있을 이덕무가 베껴 쓴 책이 궁금해진다.
용서 도중 자신을 위해 한 부씩 더 옮겨 적어 가며 이덕무는 공부했다. 겨울엔 동상으로 열 손가락 끝이 밤톨만 하게 부어 올라서도 벼루의 얼음을 호호 녹여가며 계속 베껴 썼다. 용서성학(傭書成學)! 그는 베껴 쓰기로 학문을 이루어 남이 넘보지 못할 우뚝한 금자탑을 세웠다. 새해에는 자꾸 투덜거리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