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이 젊은 시절 감목관(監牧官)으로 말 목장에 파견되면서 시 한 수를 썼다. 앞의 네 구는 이렇다. "기북(冀北)에서 좋은 말을 가려내어서, 금대(金臺)에서 특별한 은총 입었네. 몸을 삼가 수마(數馬)를 생각하지만, 감목으로 말 먹임이 부끄러워라.(冀野掄侖材重, 金臺荷寵殊. 謹身思數馬, 監牧愧攻駒.)" 과거에 급제해 큰 뜻을 펼쳐볼 줄 알았는데 고작 말 목장에서 말똥이나 치우고 망아지 기르는 일이나 감독하는 관원이 된 일을 자조한 내용이다.
제3구의 수마(數馬)는 고사가 있다. 진(晉) 나라 때 석경(石慶)이 태복(太僕)으로 수레를 몰고 나갔다. 왕이 그에게 불쑥 수레를 끄는 말이 몇 마리냐고 물었다. 석경은 채찍으로 말의 숫자를 하나하나 세더니 손가락 여섯 개를 펴보이며 "여섯 마리입니다"라고 말했다. 뒤에 승상의 지위에 올랐다. '한서'에 나온다. 허균은 당장의 신세가 비록 한심해도 근신수마(謹身數馬)의 마음가짐을 지녀 장차 천리마 같은 인재가 되리라는 포부로 이어지는 시를 마무리 지었다.
명종의 환후가 위중하자 영의정 이준경(李浚慶·1499~1572)이 숙직하며 곁을 지켰다. 밤중에 왕의 병세가 갑자기 위독해졌다. 후계조차 못 정한 상태였다. 이준경이 침전 밖에서 뒤를 이을 사람을 물었다. 인순왕후(仁順王后)가 덕흥군의 셋째 아들로 보위를 이으라는 전교를 내렸다. 입직해 있던 재상 여럿이 이미 대전 섬돌 위로 올라와 있었다. 이준경이 말했다. "소신은 귀가 어둡습니다. 다시 하교해 주소서." 왕후는 모두가 분명하게 들을 수 있도록 두 번 세 번 또렷하게 말했다. 그제서야 이준경은 윤탁연(尹卓然)에게 전교를 받아 적게 했다. 윤탁연은 '제삼자(第三子)'의 삼(三)을 '삼(參)'으로 썼다. 이준경이 이를 보고 말했다. " 이 누구의 아들인고?" 기특해서 한 말이었다. '기언(記言)'에 나온다.
영의정은 뻔히 듣고도 크게 말해 달라고 했다. 승지는 '삼(三)'이라 쓰지 않고 '삼(參)'으로 썼다. 국가의 대계가 걸린 문제라 혹시 있을지 모를 오해의 여지를 이렇게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평소 몸에 밴 신중함이 아니고는 이럴 수가 없다. 나라 일에 대충대충 설렁설렁은 있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