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세설신어

[정민의 世說新語] [327] 생사사생(省事事省)

bindol 2020. 8. 3. 06:08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홍석주(洪奭周·1774~1842)는 책 여러 권을 동시다발로 보았다. 빡빡한 일정 속에 다양한 독서를 배치해 조금씩 야금야금 읽었다. 아침에 머리 빗을 때 읽는 책과 안채 자리 곁에 두는 책이 달랐다. 머리맡에 두고 잠자기 전에 읽을 책은 또 달랐다. 진도는 더뎠지만 잊어버리고 읽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장을 덮게 되곤 했다.

이런 독서 습관은 공직에 나가 정신없이 바쁠 때도 한결같았다. 그때는 주로 '한서(漢書)'를 읽었다.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일어난 일에 관한 기록이어서 생각해볼 거리가 많았다. 공무에 지쳐 귀가해도 반드시 몇 줄이라도 읽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너무 피곤하면 눈을 감고 전에 읽은 글을 암송했다. 외우다 잠이 들곤 했는데 입은 그대로 글을 외우고 있었고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 그는 또 날마다 일과를 정해 읽었다. 그가 말했다. "일과는 하나라도 빠뜨리면 안 된다. 사정이 있다고 거르면 일이 없을 때도 게을러진다." 또 말했다. "책 한 권을 다 읽을 만큼 길게 한가한 때를 기다린 뒤에야 책을 편다면 평생 가도 책을 읽을 만한 날은 없다. 비록 아주 바쁜 중에도 한 글자를 읽을 만한 틈이 생기면 한 글자라도 읽는 것이 옳다." 아우 홍길주(洪吉周)가 쓴 '수여연필(睡餘演筆)'에 나온다.

이삼환(李森煥·1729~1814)이 종조부인 성호 이익(李瀷) 선생을 찾아뵙자 선생이 물었다. "무슨 책을 읽느냐?" "'상서(尙書)'를 읽는데 개인적으로 번다한 일에 휘둘려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생이 말했다. "몸이 한가해서 일이 없을 때를 기다려 독서한다면 죽을 때까지 독서할 여가는 없다. 일을 만들면 일이 생기지만(生事事生), 일을 줄이면 일이 주는 법(省事 事省)이다. 유념하도록 해라." 이삼환이 정리한 '성호선생언행록'에 보인다.

너무 바빠 시간이 없어 책을 못 읽는다는 것처럼 슬픈 말이 없다. 마음이 일을 만든다. 쓸데없는 일은 끊임없이 궁리해내면서 나를 반듯하게 세워 줄 책은 멀리하니 마음 밭이 날로 황폐해진다. 오가는 지하철에서만 책을 읽어도 삶이 문득 바뀐다. 휴대폰을 잠깐 내려놓아도 낙오하지 않는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8/11/201508110409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