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세설신어

[정민의 世說新語] [344] 감인세계(堪忍世界)

bindol 2020. 8. 3. 06:35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유만주(兪晩柱, 1755-1788)가 '흠영(欽英)' 중 1784년 2월 5일의 일기에서 썼다. "우리는 감인세계(堪忍世界)에 태어났다. 참고 견뎌야 할 일이 열에 여덟아홉이다. 참아 견디며 살다가 참고 견디다 죽으니 평생이 온통 이렇다. 불교에는 출세간(出世間) 즉 세간을 벗어나는 법이 있다. 이는 감인세계를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른바 벗어난다 함은 세계를 이탈하여 별도의 땅으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고 일체의 일이 모두 허무함을 깨닫는 것이다.(我輩旣生於堪忍世界, 則堪忍之事, 十恒八九. 生於堪忍, 死於堪忍, 一世盡是也. 西敎有出世間法. 是法指出了堪忍世界之謂也. 所云出者, 非離去世界, 另赴別地. 止是悟得一切等之虛空也.)"

감인(堪忍)은 참고 견딘다는 뜻이다. 못 견딜 일도 묵묵히 감내(堪耐)하고, 하고 싶은 말도 머금어 삼킨다. 고통스러워도 꾹 참아 견딘다. 사람이 한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참아내고 견뎌내는 연습의 과정일 뿐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건너가는 한세상을 감인세계로 규정했다. 감인세계는 벗어날 수 없는가? 이 못 견딜 세상을 견뎌내는 힘은, 날마다 아등바등 얻으려 다투고 싸우는 그 대상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서 나온다. 인간의 진정한 낙원은 멀리 지리산 청학동이나 무릉도원이 아닌 우리의 마음속에 있다는 얘기다.

같은 해 3월 21일자 일기에는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일은 누(累)가 없는 것만 함이 없다. 누 때문에 세계는 참고 견뎌야만 한다.(人生最樂事, 莫如无累. 累故世界堪忍.)"고 했다. 누(累)란 나를 번거롭게 얽매고 옥죄는 일이다. 내 능력 밖의 일을 이루려 아쉬운 부탁을 하려니 남에게 누가 된다. 자식을 위해 정작 내 삶은 희생하고 살았는데 이제는 누가 되고 폐만 안겨주는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나를 옭아매던 누를 다 털어버리지도 못해 죽음이 어느새 코앞에 와있다. 이 쓸쓸한 자각을 그는 감인세계란 말로 표현했다.

"사람이 50년을 살면 쌀 2000여섬을 먹어치운다. 백년이라면 그 두 배를 웃돈다"는 옆 사람의 말에 이게 바로 미충(米虫) 즉 쌀벌레가 아니냐고 되뇌던 그의 씁쓸한 독백을 생각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2/08/201512080427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