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세설신어

[정민의 世說新語] [368] 방무운인(傍無韻人)

bindol 2020. 8. 3. 08:00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책꽂이를 정리하는데 해묵은 복사물 하나가 튀어나온다. 오래전 한상봉 선생이 복사해준 자료다. 다산의 간찰과 증언(贈言)을 누군가 베껴 둔 것인데 상태가 희미하고 글씨도 난필이어서 도저히 못 읽고 덮어두었던 것이다. 확대 복사해서 확대경까지 들이대니 안 보이던 글자들이 조금씩 보인다. 여러 날 걸려 하나하나 붓으로 필사했다. 20여 통 모두 짤막한 단간(短簡)이다. 유배지의 적막한 나날 속에 사람 그리운 심사가 애틋하다. 세 통만 소개한다.

"편지 받고 부인의 병환이 이미 회복된 줄은 알았으나 그래도 몹시 놀라 탄식하였습니다. 제 병증은 전과 같습니다. 제생들이 과거 시험을 함께 보러 가서 거처가 텅 비어 적막하군요. 매일 밤 달빛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이만 줄입니다(奉書審有閤憂 雖已平復 驚歎猶深. 弟病狀如昔. 諸生竝作科行 齋居淸寂. 每夜月色 無與共之者 爲可恨也. 不具)."

"지각(池閣)에 밤이 깊어 산달이 점점 올라오면 텅 빈 섬돌은 마름풀이 떠다니는 듯 너울너울 춤을 추며 옷깃을 당기지요. 홀로 정신을 내달려 복희씨와 신농씨의 세상으로 가곤 합니다. 다만 곁에 더불어 얘기를 나눌 만한 운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이[傍無韻人] 안타깝습니다(池閣夜深 山月漸高. 空階藻荇 飜舞攬衣. 獨往馳神羲農之世 但恨傍無韻人 與之談論也)."

"꽃이 한창 흐드러지게 피었는데 형께서는 건강이 어떠신지요. 보고 싶습니다. 저는 별일 없이 그럭저럭 지냅니다. 봄 동산의 붉고 푸른 빛깔이 날마다 사랑스럽군요. 이러한 때 한번 들르셔서 노년에 봄을 보내며 드는 이런저런 생각을 달래보는 것이 어떠실는지요. 진작 하인을 시켜 평상을 닦아놓고 기다리고 있으니 혼자 있게 하지 않으시면 고맙겠습니다. 어떠십니까. 이만 줄입니다(花事 方暢 未審兄軆益勝 慰仰慰仰. 弟省事姑依 餘無聞. 春園紅綠 日漸可愛 際玆一顧 慰此暮年送春之餘思如何. 早使山丁 掃榻以待 幸勿孤如何. 餘不宣)."

풍증으로 팔에 마비가 온 상태로 공부에 몰입하면서도 그는 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그 한 사람이 그리웠던 것이다. 20통에 이르는 짧은 편지를 필사하는 사이 다산의 한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 내 안에 단단하게 새겨졌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5/31/201605310368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