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세설신어

[정민의 世說新語] [529] 미견여금 (未見如今)

bindol 2020. 8. 5. 06:25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이대순(李大醇)은 서얼이었지만 경학에 정통했고 예문(禮文)도 많이 알아, 어린이를 가르치는 동몽훈도(童蒙訓導) 노릇을 하며 살았다. 제자 중에 과거에 급제해서 조정에 선 사람이 적지 않았다. 임진왜란 이후 금천(衿川) 땅에 유락해 먹고살 길이 없었다. 한 대신이 딱하게 보아 다시 훈도 노릇을 하게 해주었다.

이대순은 상경해서 남대문 안쪽 길가에 서당을 열었다. 원근에서 배우러 온 자가 많았다. 그의 학습법은 엄격했다. 전날 읽은 것을 못 외우면 종아리를 때렸다. 도착한 순서대로 가르쳤다. 교과과정은 엄격했고, 나이 순서로 앉혔다.

학생들이 성을 내며 대들었다. "아니 저 자식은 서얼인데 내가 그 아래에 앉으라고요?" "내가 조금 늦게 왔지만, 저 녀석이 감히 나보다 먼저 배워요?" 툭하면 으르렁대고 번번이 싸웠다. 이대순이 견디다 못해 조금 나무라기라도 하면 반드시 면전에서 스승에게 욕을 보였다.

이대순이 대신 집을 찾아와 작별 인사를 했다. 대신이 연유를 묻자 대답이 이랬다. "제 나이가 60여 세인데, 지금 같은 꼴은 처음 봅니다(未見如今日之風敎). 젖비린내 나는 아이들이 벌써 당색을 나누고, 글자도 모르는 녀석들이 시정(時政)을 평가합니다. 길에 '물렀거라' 소리가 나기만 하면 공부하다 말고 앞다퉈 뛰어나가 '재상 아무개로군. 아무 쪽의 당색이야. 사람이 크게 간악하지'라 하고, 또 '아무개 어르신을 뵙는군. 아무 쪽의 당색인데, 아주 어지신 분이야'라고 합니다. 제가 속한 당색이 아니면 아무리 고관대작이라도 이름을 마구 부르며 업신여겨 욕합니다. 또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비단옷만 입습니다. 너무도 한심합니다. 이런데도 안 고치면 나라가 곧 망할 것입니다. 하찮은 녹 때문에 서울에 오래 머물다가 는 틀림없이 큰 화를 입을 것입니다. 그래서 떠납니다."

1622년 겨울 일이었다. 이듬해 바로 인조반정이 일어나 세상이 뒤집어졌다. 사람들이 그의 선견지명에 크게 놀랐다. 이덕형(李德泂·1566~1645)의 '죽창한화(竹窓閑話)'에 나온다. 지금은 중학교 1학년 교실에서 돈 2만원 준다는 장난 소리에 학생이 수업 중인 선생 머리를 다짜고짜 때리는 세상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7/24/201907240269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