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식의 한시한수

시인의 용기[이준식의 한시 한 수]〈64〉

bindol 2020. 9. 2. 15:46

息夫人 / 王維

 

莫以今時寵 막이금시총
能忘舊日恩 능망구일은
看花滿眼淚 간화만안루
不共楚王言 불공총왕언

 

지금 총애를 받는다고
옛정을 잊을 수 있다고 생각지 마오
꽃을 보고도 눈물만 그렁그렁
초왕과는 말도 나누지 않았다오

 

 

식부인은 춘추시대 식국(息國) 군주의 아내.
초나라 문왕(文王)이 식국을 정벌하여 식부인을 빼앗아오자
식국 군주는 울분을 삭이다 병사하고 말았다.


끌려온 식부인은 문왕과의 사이에 두 아들까지 두었지만
문왕과는 말 한마디 섞지 않았다.
호사로운 궁중 생활이었지만 꽃을 보고도 눈물을 쏟을 정도로 식부인은
옛 남편을 그리워했고, 그만큼 문왕에 대한 원한도 깊었다.


오랜 역사 속 상처를 왕유가 왜 새삼 들추어냈을까.
당 현종의 친형 寧王은 수십 명의 미녀를 곁에 둘 정도로 생활이 방탕했다.
하루는 어느 떡장수 아내의 미색에 반해 여자를 탈취해왔다.


1년이 지나 한 연회석상에서 영왕이 여자에게 물었다.
아직도 남편을 그리워하는가?’
그간 영왕의 총애를 듬뿍 받았지만 여자는 묵묵부답,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영왕이 떡장수를 불러들였고 남편을 본 여자는 와락 눈물을 쏟아냈다.
연회에 모인 손님들이 이 애절한 장면을 목도하고는 동정을 금치 못했다.
분위기가 싸늘했지만 영왕은 개의치 않고 다들 시 한 수씩 지으라고 명했다.


첫 지목을 받은 이가 바로 왕유. 그는 떡장수 아내의 처지를 식부인에 빗대었다.
그대가 아무리 총애한들 남편을 향한 내 마음이 변할 리 있겠소?


그대와는 말도 섞기 싫소. 여자의 심정을 헤아린 시인은
영왕의 횡포를 이렇게 비꼬았다.
수채화처럼 담담한 산수시를 주로 읊었던 시인이지만
스무 살 젊은 시절에는 불의에 맞서는 이런 기개도 있었다.

시인의 용기 있는 비유 덕에 결국 여자는 남편 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