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

러허사변 참가한 요시코, 일본 기녀들 동원해 관동군 격려

bindol 2020. 10. 10. 05:32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46〉

중국은 나라가 크다 보니 일본과 내통한 정권도 많았다. 1933년 3월, 자치정부 선포식에 참석한 인루겅. 일본 패망 후 총살로 삶을 마감했다. [사진 김명호]

 

1933년 2월 중순 일본 관동군이 러허(熱河)를 침략했다. 가와시마 요시코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관동군의 묵인하에 조직한 안국군(安國軍)을 이끌고 작전에 참여했다. 요시코는 군 지휘 경험이 없었다. 일본 기녀(妓女)들을 동원해 관동군의 사기진작에 힘썼다.

항일영웅 마덴산 유혹하러 갔다
일본 헌병대 장교 몽둥이로 패

소녀 시절부터 알던 도조 히데키
일본 요릿집 인수해 경영 맡겨

구룡보검 주고 풀려난 마한싼
일 패망 후 요시코 체포하기도

요시코는 대담하고, 거칠었다. 관동군과 만주군이 마덴산(馬占山·마점산)과 수빙원(蘇炳文·소병문)의 항일부대에 애를 먹자 직접 나섰다. 양부 가와시마 나니에의 친딸 치즈코(千鶴子)가 구술을 남겼다.

친일정부 세운 인루겅에게 퇴짜 맞아

관동군 헌병들과 함께한 요시코(앞줄 왼쪽)와 양부의 딸 치즈코(앞줄 오른쪽). [사진 김명호]

 

“언니는 ‘비행기로 수빙원의 주둔지 상공에 가서 낙하산 타고 침투해 유혹하면 제까짓 게 별수 있겠느냐’며 관동군 참모장에게 큰소리를 쳤다. 참모장은 언니의 계획을 승인하지는 않았지만 대단한 여인이라며 찬탄했다. 항일영웅 마덴산은 춤을 좋아했다. 언니는 직업 댄서 차림으로 마덴산에게 접근했다가 경호원에게 쫓겨났다. 헌병장교가 마덴산 대신 나와 며칠간 춤 여행이나 가자고 조롱하자 몽둥이로 두들겨 팼다.”

헌병장교 구타를 계기로 관동군은 요시코를 멀리했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측근이던 인루겅(殷汝耕·은여경)이 일본과 내통, 화북(華北)에 친일정부(화북정무위원회)를 세웠다. 요시코는 군량미와 장비 납품권 등을 요구했다. 거절당하자 중국을 떠났다.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소녀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도조 히데키가 집권하자 마음이 들떴다. 태평양전쟁으로 전선이 확대됐다. 일본은 인력과 물자 결핍에 시달렸다. 도조는 충칭(重慶)의 국민정부와 대화를 희망했다. 요시코가 도조의 부인 가쓰코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편에게 꼭 전해라. 장제스 휘하의 군 지휘관 중에 아는 사람이 많다. 중국과의 평화회담을 성사시킬 자신이 있다.” 가쓰코는 청나라 왕녀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도조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직 그런 여자를 내세울 정도는 아니다.” 속으로는 요시코의 판단에 놀랐다. 베이징 주재 헌병사령관에게 전문을 보냈다. “가와시마 요시코를 베이징에 파견할 예정이다. 일본 요릿집 둥싱러우(東興樓)를 인수해 경영을 맡겨라. 국민당 요원들과 폭넓은 접촉을 하도록 도와줘라.”

헌병사령관은 요시코에게 홀딱 빠졌다.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둥싱러우는 해만 지면 화북정무위원회와 출장 온 만주국 요인, 유명 경극 배우들로 북적거렸다. 다이리(戴笠·대립)가 지휘하는 국민당 중앙위원회 조사통계국(軍統) 특무요원들도 빠지지 않았다. 요시코는 일본에서 데리고 온 기녀들에게 단골 마한싼(馬漢三·마한삼)의 신분 파악을 당부했다.

일본 헌병사령관, 요시코 집서 출근 일쑤

일본이 난징에 수립한 괴뢰정부(僞南京政府) 군관학교 장교들의 충성선서식. [사진 김명호]

 

1940년 2월, 일본헌병대가 극비리에 마한싼을 체포했다. 마는 군통 베이징 책임자라는 신분을 밝히고 거래를 제안했다. 정보 제공은 물론, 건륭제(乾隆帝)가 착용했던 구룡보검(九龍寶劍)까지 사령관에게 주고 잡혀올 때처럼 비밀리에 풀려났다. 헌병사령관은 요시코의 집에서 출근하는 날이 많았다. 하루는 호기를 부렸다. “네 조상들이 애지중지했다는 보검이다. 내 선물이니 잘 간직해라.” 요시코는 누가 준 물건인지 짚이는 바가 있었다.

일본 패망 후 베이징의 군통 요원들이 요시코의 집을 에워쌌다. 마한싼이 직접 요시코를 체포하고 구룡보검을 압수했다. 보고를 받은 다이리는 요시코에게 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우리 귀에도 익숙한 대형 약방 주인이 황금불상 들고 마한싼을 찾아갔다. 요시코는 당일로 풀려났다. 며칠 후 다이리가 마한싼에게 전문을 보냈다. “가와시마 요시코를 체포해라. 엄하게 다뤄라.”

일본의 대륙 침략에는 기녀(妓女)들도 한몫했다. 중일전쟁 시절 중국의 공원에는 놀러 나온 기녀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사진 김명호]

 

1946년 3월 초, 다이리가 베이징에 나타났다. 요시코를 직접 심문했다. 북방의 특무조직 강화를 위해 정보가 필요했던 다이리는 엉뚱한 말을 듣고 경악했다. “5년 전 마한싼이 일본 헌병대에 체포됐다. 군통의 비밀을 털어놓고 풀려났다. 내가 갖고 있던 구룡보검도 뺏어갔다.” 구룡보검은 군벌 쑨덴잉(孫殿英·손전영)이 건륭제와 서태후의 능을 도굴해서 얻은 보물 중에 보물이었다. 쑨은 보검을 장제스에게 진상하기 위해 다이리에게 전달했다. 다이리는 전란 중이라 마한싼에게 맡겨뒀다. 마는 기회를 봐서 구룡보검 들고 중국을 떠날 생각을 했다. 일본 헌병대에 잡히는 바람에 계획이 틀어졌다. 가까운 일본 기녀 통해 보검의 소재를 알자 직접 요시코를 체포한 것은 구룡보검 때문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다이리는 내색을 안 했다. 마한싼이 주는 구룡보검 들고 약방 주인 만나 요시코를 부탁한 후 전용기에 올랐다. 마한싼은 불안했다. 중간 기착지 상하이에 측근을 급파했다. 상하이에서 급유 중인 다이리의 전용기에 폭탄을 장치했다. 그날따라 비바람이 거셌다. 전용기는 난징(南京) 인근 야산에 추락했다. 국민당은 단순 추락이라 발표하고 조사에 들어갔다. 6월 30일 다이리의 후임이 베이징에 와서 마한싼과 부하 3명을 총살했다.

가와시마 요시코의 처형은 다이리 사망 2년 후였다. 다른 사람을 처형했다면, 요시코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은 약방 주인이나 다이리의 후임 마오런펑(毛人鳳·모인봉) 정도는 돼야 말이 된다. 추론일 뿐 근거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