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45〉 1934년 6월 16일 ‘국민혁명군 중앙군관학교(황푸군관학교의 본명)’ 성립 10주년 기념식을 마치고 열병식을 진행하는 장제스(앞줄 왼쪽 첫째)와 왕징웨이(오른쪽 셋째). 오른쪽 둘째는 국부 쑨원의 아들 쑨커(孫科). 한때 쑨원의 후계자였던 왕징웨이는 군에 기반이 없었다. 결국 일본과 합작, 중국역사상 최대의 한간이라는 오명을 남겼다. [사진 김명호] 지난 60여년간 중국은 상상을 초월하는 정보조직이었던 국민당 중앙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軍統) 국장 다이리(戴笠·대립)와 가와시마 요시코의 합작설이 그치지 않았다. 길지만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1931년 3월, 국민정부 주석과 육해공군 총사령관에 취임한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정보기관 설립에 착수했다. 특무처장 다이리에게 지시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황푸군관학교(중앙군관학교의 전신) 출신 150명가량을 선발해라. 한 명씩 직접 면담하겠다.” 장제스 지시로 정보조직 창설
다이리는 난징(南京)의 유서 깊은 사찰 향림사(香林寺)에 비밀 캠프를 차렸다. 전쟁 시절 한간(漢奸) 암살의 고수였던 군통 최고의 살수(殺手) 천궁펑(陳恭澍·진공팽)이 회고를 남겼다. “황푸군관학교 출신들에게 장공(蔣公)은 영원한 교장이었다. 주석이나 총통 시절에도 우리는 여전히 교장이라고 불렀다.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 린뱌오(林彪·임표), 천껑(陳賡·진갱) 등도 마찬가지였다. 황푸 출신들은 다 그랬다. 군통을 지휘하던 다이리. 살아있는 유령 소리 듣던 공포의 상징이었다. [사진 김명호] 생도들은 교장과 단독으로 대화 나눈 적이 없었다. 개별 면담이라는 말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국궁(鞠躬)을 마치고 부동자세 취하자 명부를 보던 교장이 가족 사항을 물었다. 그저 대답만 했다. 하는 일에 흥미를 느끼냐는 질문에 용기를 냈다. ‘군사 방면은 아직 생소합니다. 다른 업무를 배우고 싶습니다.’ 교장은 반응이 없었다. 붓으로 명부에 무슨 표시를 하고 일어섰다. 나가도 좋다는 의미였다. 밖으로 나온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벽에 기대 심호흡 몇 차례 하고 나서야 긴장이 풀리고 풍경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일본으로 입양되기 직전의 가와시마 요시코. 1912년 봄. 뤼순(旅順). [사진 김명호] 14명은 육상산전집(陸象山全集)과 왕양명전집(王陽明全集), 증국번가서(曾國藩家書), 척계광치병어록(戚繼光治兵語錄), 삼민주의이론체계(三民主義理論體系) 펴놓고 밤을 새웠다. 시험은 따로 없었다. 매주 한 번, 읽은 책들을 다이리 통해 장제스에게 보냈다. 장제스는 14명의 독서찰기를 함부로 하지 않았다. 직접 읽으며 친필로 교열한 후 본인에게 돌려줬다. 독서찰기보다 장제스의 교열 내용이 더 긴 경우가 많았다. 난징의 괴뢰정부(汪僞政權) 주석 시절 일본을 방문, 일본 총리 도조 히데키(앞줄 군복)와 만찬 전 기념사진을 남긴 왕징웨이(앞줄 왼쪽 첫째). [사진 김명호] 화베이(華北) 주둔 중인 일본군 참모본부를 설득했다. “전 행정원장 왕징웨이(汪精衛·왕정위)가 일본과 평화협상을 하겠다며 충칭을 떠났을 때, 다이리는 자신이 양성한 암살단을 하노이에 파견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난징에 도착한 왕징웨이가 정부를 선포했을 때도 집념을 포기하지 않았다. 중국인들끼리 죽고 죽이기를 반복할수록 일본이 손해 볼 것은 없다. 이화제화(以華制華), 중국인이 중국인을 제압할 수 있도록 이간책을 쓰자. 다이리가 필요한 정보를 요구하기 전에 줘 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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