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세설신어

[정민의 世說新語] [593] 유초유종 (有初有終)

bindol 2020. 10. 22. 05:24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정조가 ‘경사강의(經史講義)’에서 말했다. “예부터 임금이 즉위 초에 정신을 쏟기는 쉬워도, 끝까지 훌륭한 명성으로 마치기는 어려웠다. 이는 지기(志氣)의 성쇠로만 논할 수가 없다.” 그러면서 한 무제(武帝)와 당 덕종(德宗)의 예를 들었다.

한 무제는 기원전 89년에 윤대(輪臺)에서 내린 조서에서 서역과 흉노를 상대로 벌인 전쟁을 후회하며, 백성의 삶을 돌보지 않은 자신의 지난 잘못을 인정했다. 이 조서가 유명한 ‘윤대죄기조(輪臺罪己詔)’다. 평생 전장을 누볐던 정벌 군주가 제 잘못을 직접 죄 주고, 정책 기조를 수문(守文)으로 전환했다. 처음은 나빴지만 끝이 좋았다.

당나라 덕종은 즉위 초에 당 태종을 본받겠다며, 코끼리를 풀어주고, 궁녀를 내보냈다. 아첨을 막겠다고 상서로움을 아뢰지도 못하게 했다. 그런데 산뜻한 출발과 달리 이후의 정령(政令)과 시책은 하나같이 엉망진창이었다. 노기(盧杞)와 같은 간신이 늘 곁을 맴돌았고, 육지(陸贄) 같은 어진 이는 외직으로만 떠돌았다. 세금을 거두기만 하고 백성을 위해 쓸 줄은 몰랐다. 번진(藩鎭)이 제멋대로 굴어도 규제하지 못했다. 정조의 질문은 이랬다. 이 두 예로 볼 때 임금의 나이나 정신의 총기만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덕종의 문제는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성균관 유생 이규하(李圭夏)가 대답했다. “‘시경’에 ‘시작이 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끝을 잘 마치는 이가 드물다(靡不有初, 鮮克有終)’고 했습니다. 한 무제는 늘그막에 허물을 고칠 줄 알았고, 당 덕종은 몇 년 만에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뜻을 세움이 굳건하지 않아, 훌륭한 일을 하기에 부족했기 때문입니다(立志不固, 無足有爲).”

당 태종의 신하 위징(魏徵)은 ‘십점불극종소(十漸不克終疏)’를 올렸다. 태종이 점차 초심을 잃어 열 가지 나라 일이 점점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지적을 돌직구로 날린 글이었다. 당 태종이 정관지치(貞觀之治)를 이룬 바탕에는 위징처럼 직언하는 신하가 있었다. 당 덕종이 몇 년 만에 나라를 말아먹은 것은, 곁에 노기 같은 무능한 간신들이 에워싸고 있어서였다. 시작이 있어야 하지만 끝이 더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