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謙齋) 정선(鄭敾)이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을 그림으로 표현한 화첩 중 ‘자연(自然)’을 그린 그림의 화제(畫題)에는 “진한데 맛은 적으니, 이것은 영웅이 사람을 속여먹는 솜씨이다(濃而少味, 此英雄欺人手也)”라는 평이 달려 있다. 안개 자옥한 풍경 속에 우모(雨帽)를 쓴 낚시꾼이 낚싯대를 펼 생각도 없이 안개에 지워져 가는 건너편 풍경을 바라본다. 안개 낀 풍경은 지나치게 세세하면 안 된다. 그래서 건너편 숲은 아주 흐린 먹으로 뭉개듯 붓질을 겹쳐 놓았다. 맛이 적다고 말한 것은 맛을 일부러 줄여 감쇄시켰다는 뜻이다. 잘 그릴 수 있지만 일부러 못 그린 그림처럼 붓질을 어눌하게 해서 그림의 맛을 담백하게 했다. 그리고 이것이 영웅기인(英雄欺人)의 솜씨라고 설명했다. 영웅은 자신의 역량을 아무 때나 드러내지 않는다. 보통 때는 어수룩하게 자신을 감추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스르렁 칼을 뽑는다. 그제야 세상이 비로소 그를 알아본다. 평소에 재주를 못 이겨 남을 우습게 보며 깝죽대는 것은 영웅의 기상이 아니다. 이 말은 명나라 이반룡(李攀龍)이 ‘선당시서(選唐詩序)’에서, “7언 고시의 경우, 오직 두보만이 초당(初唐)의 기운과 격조를 잃지 않고 마음대로 하였다. 이백도 자유자재로 했지만, 이따금 강한 쇠뇌의 끝에다 중간중간 장황한 말을 섞었으니, 영웅이 사람을 속인 것일 뿐이다(七言古诗, 唯杜子美不失初唐氣格, 而縱横有之. 太白縱横, 往往强弩之末, 間雜長语, 英雄欺人耳)”라 한 데서 처음 나온다. 두보는 한결같이 굳센데, 이백은 중간에 군더더기를 섞었다. 그게 역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기 재능을 숨기려는 속임수라는 말이다.
이반룡이 고른 당시가 일반적 기준에서는 들쭉날쭉해 보였던 듯, 왕세정(王世貞)은 이 말을 받아, “영웅은 사람을 속이니, 전부 믿어서는 안 된다(英雄欺人, 不可盡信)”고 그의 안목을 평가했다. 맛을 조금 덜어내야 농밀함이 평정(平靜)을 얻는다. 영웅은 아무 때, 아무 데서나 예기(銳氣)를 드러내지 않는다. 맛을 덜어내라. 힘을 빼고 더 어수룩해져야 한다. 가장 빛나는 절정의 한 순간을 위해 참고 또 기다린다. 나뭇가지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매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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