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聞column

[서소문 포럼] 위기 맞은 포용정치[출처: 중앙일보]

bindol 2020. 11. 12. 05:53

정재홍 기자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대선 패배에도 소송전을 예고하며 승복하지 않고 있다. 트럼프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처 실패와 거짓말 유포, 대통령 직위를 이용한 이권 챙기기 등으로 역대 최악의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도 이번 대선에서 드러났듯 그의 지지자가 상당하다. 비록 패했지만 7100만 표(47.6%) 이상을 얻어 역대 공화당 대선 후보 중 가장 많은 표를 얻었다. 펜실베이니아·미시간·위스콘신 등 러스트벨트(쇠락한 북동부 공업지대)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과 박빙의 대결을 벌였다.

여권의 입법·사법·행정 장악 위험
권력 집중으로 견제·균형 어려워져
포용정치 없으면 국가 퇴보 불가피

거짓을 일삼고 국민을 분열시키며 대통령의 품위를 찾기 힘든 트럼프를 미국인의 절반가량은 왜 지지할까. 트럼프의 주요 지지 기반은 저학력 백인 노동자다. 이들은 역대 공화당이나 민주당 정권 모두로부터 외면당했다. 세계화로 국제 경쟁에 노출된 이들은 실질 임금이 깎이거나 일자리를 잃었다. 미국 정치권은 이들의 고통을 세계화의 불가피한 과정으로 여겼다. 이들은 정치권에서 자신들이 무시당하자 불만과 분노를 쌓았다. 정치 아웃사이더인 트럼프가 이를 낚아채 자신의 지지 기반으로 삼았다. 기존 정치가 사회 소외층을 끌어안지 못하자 극단화된 것이다.

최근 유럽에서도 사회 소외층의 극단주의 테러가 잇따랐다. 지난달 중순 파리 인근 중학교에서 표현의 자유를 가르치던 교사가 18세 체첸 출신 청년에게 참수당했고, 지난달 29일에는 니스의 성당에서 20대 튀니지 출신 남성의 흉기 테러로 3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난 2일에는 오스트리아 빈의 유대교회당 인근에서 20세 보스니아 출신 이민자의 총격 테러로 4명이 숨졌다. 이들은 제대로 된 일자리가 없어 불안한 생활을 하다 극단주의에 빠졌다.

맹자의 말처럼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을 갖기 어렵다. 직업이나 생활이 안정되지 않은 사람은 평상심을 갖기 힘들어 극단주의에 쉽게 넘어간다. 특히 한창 일할 청년 시절에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갖지 못하면 사회에 불만을 갖기 쉽다. 통계청에 따르면 15~29세 청년들의 체감 실업률은 25.4%(9월)로 관련 통계 작성 후 최악 수준이다. 코로나19 등으로 대기업들이 신규 채용을 꺼리며 청년들이 중산층으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이 좁아지고 있다.

서소문 포럼 11/12

여기에 교육을 통한 계층 상승도 힘들어지고 있다. 한국장학재단에 따르면 올해 SKY(서울·고려·연세) 대학 신입생의 절반 이상이 고소득층 자녀인 것으로 나타났다. 고소득층 자녀는 부모의 지원에 힘입어 학원 교습 등을 통해 좋은 대학에 가는 반면, 저소득층 자녀는 좋은 대학에 가기 힘들어졌다. 코로나19로 비대면 수업이 이뤄지며 교육 여건이 좋은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 간 교육 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다.

빈부 격차 고착화는 사회 역동성을 떨어뜨린다. 가난한 집안 출신이 성공할 가능성이 줄며 사회에 대한 불만도 커진다. 국제통화기금(IMF)·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극심한 빈부 격차가 경제 성장도 가로막는다고 지적했다. IMF는 세계적 소득 불평등 심화와 실업을 완화하려면 ‘포용적 성장’(Inclusive growth)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대런 애쓰모글루 MIT 경제학과 교수 등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포용적 성장이 가능하려면 포용적 정치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분석했다. 정치가 포용적이려면 최고 지도자가 권력을 전횡하지 못하도록 견제와 균형이 필요하다. 우리 헌법이 입법·사법·행정의 삼권 분립을 명시한 것도 권력 기관들이 상호 견제하며 균형을 이루라는 취지다.

최근 문재인 정권에서 견제와 균형이 사라지는 것은 헌법 원리에 어긋나고 포용적 정치에 반한다. 국회에선 여당이 다수 의석을 무기로 무리한 입법을 밀어붙인다. 사법부에선 진보 성향의 판사들이 요직에 배치된다. 추미애 법무장관은 윤석열 검찰총장을 밀어내고 검찰을 장악하려고 무리수를 둔다. 견제와 균형이 사라진 국가는 국민보다 최고 권력자의 이익을 우선한다. 스트롱맨이 통치하는 중국·러시아·터키·헝가리·필리핀 등에서 이런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

한국은 지금까지 포용적 정치·경제 체제로 경제 성장과 민주주의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문 대통령이 진영 논리에 갇혀 야당이나 반대편의 이야기를 무시하고, 제왕적 권력을 행사하면서 한국의 포용성은 위협받고 있다. 포용적 정치·경제로 풍요를 누렸던 고대 로마나 베네치아가 정치권력 독점으로 경제까지 망가지며 몰락한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출처: 중앙일보] [서소문 포럼] 위기 맞은 포용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