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봉의 漢詩 이야기

동지 팥죽

bindol 2021. 1. 1. 07:12

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 김태봉

 

 

동지(冬至)는 24절기 중 22번째 절기로 한 해 중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날이다.

그래서 선인들은 동지(冬至)를 한 해의 마무리이자 또 한 해의 시작으로 간주하였다.

양력으로 12월 21일이나 22일과 겹치는 동짓날이면 집집마다 팥죽을 쑤곤 하였다.

선인들이 동짓날 팥죽을 쑨 의도는,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또 한 해를 시작하면서 집안의 부정한 기운을 몰아내고자 함이었다.

왜냐하면 팥죽의 붉은 빛깔에 악귀를 예방하는 벽사의 의미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팥죽이 다 되면, 먼저 사당에 올려 동지 고사를 지내고,

방과 장독, 헛간 등 집안 구석구석에 두었다가,

다 식고 나면 집안 식구들이 둘러앉아 나누어 먹었다.

 

고려(高麗)의 시인 이색(李穡)도 예외 없이 동짓날 팥죽을 쑤어 먹었던 듯하다.


팥죽(豆粥)

冬至鄕風豆粥濃(동지향풍두죽농) : 나라 풍속 동지에, 콩팥죽 짙게 쑤어
盈盈翠鉢色浮空(영영취발색부공) : 비취빛 주발에 그득 담으니 빛깔이 공중에 뜨는구나.
調來崖蜜流喉吻(조래애밀류후문) : 언덕에서 딴 꿀을 섞어 목구멍에 넘기면
洗盡陰邪潤腹中(세진음사윤복중) : 삿된 기운 다 씻어내어 뱃속을 따뜻하게 하네


동짓날 팥죽을 쑤어 먹는 것은 시인의 고향 마을에서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풍습이다.

그래서 동지를 맞이하여 시인의 집에서도 가마솥에 팥죽을 한 솥 가득 진하게 쑤어냈다.

평소에도 끓여 먹는 팥죽이지만,

동짓날 팥죽이 유독 진한 것은 아마도 집안이 무탈하고

화목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일 것이다.

팥죽이 진하면 진할수록 붉은 빛깔은 더 짙어지기 마련이다.

정성 들여 끓인 이 붉디붉은 팥죽을 평소 식사를 하는 그릇에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집안 한쪽에 고이 모셔두었던 비취빛 주발에 한 그릇 가득 담아내 놓았던 것이다.

팥죽을 그릇에 가득 담은 것 또한 벽사에 대한 바람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여기에 붉은빛과 짙은 녹색의 비취빛으로 빛깔까지 음양의 조화를 꾀하였으니

그 정성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팥죽을 가득 담은 주발의 비취빛에 대비되어 팥죽의 붉은빛은

마치 공중으로 떠오르는 듯이 보여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기에 충분하였다.

귀하게 쑨 팥죽이기에 먹는 방법도 평범하지 않았다.

여니 죽을 먹듯이 후루룩 먹는 게 아니라,

깎아지른 절벽 끝에서 따온 귀하디 귀한 꿀을 섞어서 입술과 목구멍으로 흘려 내리는 방식을 취했다.

흐르는 강물에 온갖 더러운 것들이 씻겨 내려가듯,

꿀을 탄 팥죽이 목구멍을 타고 흐르면서 온갖 악한 기운을 씻어낸 것이다.

마침내 따끈한 팥죽이 뱃속에 이르자,

차가왔던 뱃속은 춘삼월 훈풍을 만난 듯이 금방 따뜻해졌다.

극즉반(極則反)이란 말이 있듯,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끝이 있게 마련이고,

끝에 이르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해도 짧아지다 보면, 언젠가 그 극(極)에 이르는데, 바로 이 날이 동지(冬至)이다.

 

그래서 동지는 한 해의 끝이자 동시에 또 한 해의 시작이다.

이런 의미 깊은 날에 붉고 따끈하게 팥죽을 쑤어 집안 곳곳에 있는 나쁜 기운을 몰아내고,

가족끼리 둘러앉아 나누어 먹는 것은 결국 또 한 해를

힘차게 살아내기 위한 에너지를 충전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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