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고구려의 궁예는 스스로 초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남의 마음을 읽는 관심법(觀心法). 그는 이 능력으로 역심 품은 부하들을 잡아냈다. 정확하게는, 잡아냈다고 주장했다. 왕건도 용의선상에 오른 적이 있었다. 그가 역심을 품었다고 자복하자 궁예는 정직하다며 사면해 준다.
“최재형에게서 같은 냄새가…” 냄새가 보이는 신비한 능력 그 능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난 크리스마스였다. 페이스북에 홀연 글이 하나 올라왔다. “너무도 생경한 선민의식과 너무도 익숙한 기득권의 냄새를 함께 풍긴다.” 글쓴이는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 법원이 ‘윤석열 검찰총장 2개월 정직’ 처분을 정지시킨 걸 두고 “검찰의 태도와 법원의 해석”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솔직히 인정하겠다. 그때는 믿음이 부족했다. 경솔하게도 문학적인 표현 정도로 여겼다.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샴푸향이 느껴진 걸까. 지난주 목요일, 임 전 실장이 다시 냄새 얘기를 꺼냈다. “전광훈, 윤석열, 그리고 이제는 최재형에게서 같은 냄새가 납니다.” 그렇다. ‘향기’나 ‘내음’이 아니다. 발 냄새, 술 냄새, 방귀 냄새 할 때의 그 ‘냄새’다. 더욱 신기한 것은 그가 코안의 점막을 사용하지 않고도 냄새를 말했다는 사실이다(최근 그가 전광훈 등과 만났다는 보도는 없었다). 남의 냄새를 꿰뚫어 보는 능력. 그의 능력은 아무래도 후천적인 듯싶다. 윤석열씨가 중앙지검장에, 최재형씨가 감사원장에 임명된 것은 그가 비서실장을 할 때였다. 그때 만약 그들의 냄새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면 그냥 보고만 있었을 리 없다. “과거에는 안 그러셨잖느냐”고 묻고 싶겠지만 받아들이자. 어떤 능력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기도 한다. 주목해야 하는 건 그 능력의 값어치다. 요즘처럼 정신없이 바쁘고 복잡한 세상에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냄새 하나로 골라낼 수 있다면 얼마나 편리한가. 후각은 감각이다. 느낌이다. 긴말이 필요 없다. 거추장스러운 팩트 체크도, 구구한 논리도 필요치 않다. ‘냄새의 구루(Guru)’를 모실 마음의 준비만 돼 있으면 된다. 눈 깜짝할 새 유통기한이 지나버리는 초고속 파이브 지(5G) 시대에 딱이다. 어쩌면 우린 이런 능력자를 기다려왔는지도 모른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조금만 더 생각해 보자. 감사원이 에너지 전환(탈원전) 정책 수립 과정의 적정성에 대한 감사에 들어갔다. 쟁점은 한둘이 아니다. 정부 정책에 대한 감사원 감사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행정부 내에서 견제와 균형은 어떻게 구현돼야 하는가. 탈원전과 4대 강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아, 머리가 지끈거린다.
“최재형 감사원장은 명백히 정치를 하고 있습니다… 집을 잘 지키라고 했더니 아예 안방을 차지하려 듭니다. 주인 의식을 가지고 일하라 했더니 주인 행세를 합니다.” 귀에 착착 감기지 않는가. 아니, 외부의 도둑이 아니라 내부의 도둑으로부터 집을 지키는 게 감사원의 역할이라고? 그러려면 안방도 가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감사 착수가 부적절하다 해도 헌법기관의 독립성까지 흔들어서야 되겠냐고? 뭘 그리 꼬치꼬치 따지는가. “차라리 전광훈처럼 광화문 태극기 집회에 참여하는 게 솔직한 태도가 아닐까.” 이 얼마나 명쾌한가. 그래도 궁금증이 남는 분은 그가 ‘전력수급기본계획’에 관해 설명해 놓은 별도의 페이스북 글을 참고하시면 된다. 결코 ‘냄새’를 폄하하거나 반박하자는 게 아니다. 모두가 고민해 봐야 할 문제이기에 하는 얘기다. ‘냄새’는 길게 토론하기도, 깊이 생각하기도 싫어하는 사회, 대화마저 귀찮게 여기는 정치를 상징한다. 따라서 이 신비한 능력을 ‘발견’한 것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만큼이나 대단한 일이다. 이제 "우리에게 방향제가 아니면 탈취제를 달라”고 해야 할까. 아… 이 글에서도 전광훈, 윤석열, 최재형의 냄새가 나는 건 아닐까. “냄새가 선을 넘는다”고 영화 ‘기생충’은 말하지 않았던가. 왕건은 아니지만 “이상한 냄새가 날 수도 있다”고 밝히는 게 낫지 않을까. 이 놀라운 ‘후각의 시대’를 살아가려면. 권석천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