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한시] 철원에서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철원에서
첫겨울 찾아오는 음력 10월 초
북쪽의 철원으로 거처 옮겼네.
우리 집은 북쪽이 넓게 펼쳐져
저 멀리로 궁예의 궁터 보이는데
성곽은 황량하게 숲을 이루고
옛 궁궐은 사람 없는 폐허 되었네.
슬픈 노래 부르며 검 어루만지고
강개한 기분 되어 책 덮어버리네.
鐵原
孟冬十月初(맹동십월초)
北遷鐵原居(북천철원거)
我家背北寬(아가배북관)
遙望弓王墟(요망궁왕허)
城郭爲荒林(성곽위황림)
古闕無人虛(고궐무인허)
悲歌撫我劍(비가무아검)
慷慨爲廢書(강개위폐서)
17세기 말엽의 소년 시인 택재(澤齋) 김창립(金昌立·1666~1683)이 13세에 지었다. 시를 잘 지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좌의정으로 재직하던 아버지 김수항(金壽恒)이 유배를 당해 전라도 영암에 머물다가 1678년 9월 강원도 철원으로 옮겨왔다. 김창립도 따라와서 집을 정하고 보니 말로만 듣던 궁예도성이 바로 집 뒤에 펼쳐져 있다. 음산한 초겨울 날씨에 궁터를 바라보니 성곽은 황량하게 숲으로 바뀌어 있고, 궁궐터는 사람 하나 살지 않는 폐허로 남아 있다. 역사의 폐허를 눈으로 보며 집안의 고난을 떠올리니 소년의 가슴은 비분강개함으로 뭉클해져 손이 자꾸만 검으로 간다. 지금도 비무장지대 숲에 황량하게 방치된 궁예도성의 쓸쓸함과 겹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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