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한시

[가슴으로 읽는 한시] 갑술년 가을

bindol 2021. 3. 13. 15:16

[가슴으로 읽는 한시] 갑술년 가을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갑술년 가을

황량한 들녘에는 쭉정이뿐
과부가 나와 줍고
벌레 먹은 복숭아나무 아래
동네 아이들 싸우고 있다.
돌보는 농부 없이
병든 이삭 가득한 논에서는
송아지 딸린 황소만이
마음대로 먹어치운다.
타작할 볏단 한 묶음
마당에 들어오지 않고
참새떼가 해질 무렵
황량한 마을에 시끄럽다.
밑도 끝도 없는 시름 풀풀 나서
책 던지고 누웠더니
때맞춰 숲 바람 불어와
문을 닫아버린다.

 

 

甲戌秋

秕稗荒原嫠婦摘(비패황원이부적)
螬桃小樹里童喧(조도소수이동훤)
滿田病穟無人管(만전병수무인관)
將犢黃牛自齕呑(장독황우자흘탄)
場圃竝無禾黍入(장포병무화서입)
日斜群雀噪荒村(일사군작조황촌)
閑愁忽忽抛書臥(한수홀홀포서와)
會事林風爲掩門(회사림풍위엄문)

 

 

 

초원(椒園) 이충익(李忠翊·1744~ 1816)이 갑술년(1814) 가을에 시를 썼다. 이해 가을을 시로 써 남겨야겠다는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제목이다. 이해는 유례없는 가뭄에 대홍수가 겹쳤다. 영남 지방이 가장 심했고, 그가 머물던 경기도는 사정이 한결 나았다. 그래도 누런 황금빛 물결 대신 황량한 들판이 펼쳐지기는 다름이 없었다. 가을걷이할 곡식이 없는 들판에 농부는 보이지 않고 과부와 아이들과 황소와 참새, 그리고 바람만이 휑·하다. 이백년 전 전국을 휩쓴 흉년의 농촌 풍경이다. 황량한 들판이 눈에 들어오자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더는 바라볼 수 없어 싱숭생숭할 때 마침 불어온 바람이 문을 쾅 닫아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