落魄江湖載酒行
落魄江湖載酒行 楚腰纖細掌中輕
十年一覺揚州夢 贏得靑樓薄倖名
낙탁강호재주행 초요섬세장중경
십년일각양주몽 영득청루박행명
강호에 실의(失意)하여 술 마시고 다닐 때
허리 가는 큰애기들 손바닥 안에서 가벼웠지
십 년 양주의 꿈 막 깨어나니
기루(妓樓)의 야박한 이름만 얻었을 뿐
杜牧 / 遣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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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楚腰: 전국(戰國)시대 초(楚)나라 영왕(靈王)이 허리 가는 미인을 좋아하자
궁중의 여인들이 저마다 허리를 가늘게 하려다 굶어죽는 일까지 발생한 고사.
- 掌中輕: 한(漢)나라 성제(成帝)의 후궁 조비연(趙飛燕)이 호수의 船上宴에서
춤을 추다 갑자기 불어닥친 바람에 떠밀려 비틀거리며 넘어지려 했다.
그 때 황제가 황급히 그의 한쪽 발목을 붙잡았고 비연은
그 상태에서 몸을 가누며 춤을 이어갔다 한다.
이로부터 "비연이 (임금의)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었다"
(飛燕作掌中舞)는 고사가 생겼다.
당시의 상황을 두고 당(唐)나라 때의 시인(詩人) 서응작(徐凝作)은
<한궁곡(漢宮曲)>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水色簾前流玉霜 趙家飛燕侍昭陽
掌中舞罷簫聲絶 三十六宮秋夜長
수색렴전유옥상 조가비연시소양
장중무파소성절 삼십육궁추야장
물색 주렴 앞 이슬 같은 옥 흘러내리는데
조비연은 소양궁으로 황제 모시네
장중무 끝나니 피리소리 끊기고
삼십육 궁의 가을밤은 깊어만 가네
- 昭陽: 소양궁. 한나라 성제(成帝) 때 황제가 거처하던 궁전.
- 三十六宮: 한나라 때 궁정에 있었다고 하는 서른여섯 개의 궁전.
당대(唐代)에 양주(揚州)는 상업이 발달하고 교역이 성행해
번화한 환락의 도시로 자리잡고 있었다.
두목(杜牧)은 젊은 시절 한동안 각지를 주유하며 풍류를 즐겼고,
특히 양주는 그에게 남다른 추억을 간직한 무대였다.
그가 다시 수도(首都)인 장안(長安)으로 귀환한 것은 문종(文宗) 태화(太和) 9(835)년이다.
'十年一覺揚州夢'이라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표현이다.
- 원대(元代) 교길(喬吉: 1280∼1345)이 지은 잡극(雜劇) 가운데
<두목지시주양주몽(杜牧之詩酒揚州夢)>, 약칭 <양주몽(揚州夢)>이 있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시인 두목(杜牧)과 기생 장호호(張好好)와의
사랑 이야기를 줄거리로 하고 있다.
두목이 어느 잔치에서 우연히 알게 된 13세의 호호를 사랑하여 신분과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극적으로 결혼에 이른다는 이야기다.
호호와의 결혼을 통해 두목은 방랑벽과 시주(詩酒)의 병적인 행적을 청산한다.
두목과 관련해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이 더 있다. 그의 저술인
≪번천문집(樊川文集)≫(권6)에 수록된 <장보고·정년전(長保皐·鄭年傳)>이다.
이는 장보고에 관한 최초의 전기에 해당한다.
김부식은 ≪삼국사기(三國史記)≫(권43) <김유신전(金庾信傳)>
말미의 찬문에서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던들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보고의
의용이 인멸되어 전문할 수 없었을 것"이라 하였다.
김부식이 말한 '중국의 서적'이 예의 두목의 ≪번천문집(樊川文集)≫이다.
장보고·을지문덕과 김부식의 생존연대는 채 300년도 차이가 나지 않는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저술하면서 300년 전의 인물인 장보고와 을지문덕의
활약상을 잘 모르고 있었다는 얘기다.
김부식이 누구인가. 당대(고려 말) 최고 지식인이자 권세가였다.
그런 김부식이 장보고와 을지문덕의 행적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면 나머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우리가 400여 년 전의 인물인 이순신(李舜臣)이나 권율(權慄)의 전공(戰功)을
잘 모른다고 하면 이해가 될까.
역시 우리 역사의 부재(不在)를 웅변해주는 전형적인 사례가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