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세설신어

[정민의 世說新語] [623] 녹동백이 (綠瞳白耳)

bindol 2021. 5. 20. 05:18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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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화가 나빙이 그린 박제가 초상화. 원본은 추사 김정희의‘세한도’를 소장했던 일본 후지즈카 교수가 가지고 있다가 일제 말기 도쿄 공습 때 소실됐고, 사진만 남았다.

박제가(朴齊家·1750~1805)의 눈동자는 초록빛을 띠었던 모양이다. ‘소전(小傳)’에서 그는 자신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 사람됨은 물소 이마에 칼 눈썹, 초록 눈동자에 흰 귀를 지녔다. 고고한 사람만 가려서 더욱 친하였고, 부귀한 자를 보면 더욱 멀리하였다. 그래서 세상과 합치됨이 적었고 늘 가난하였다.(其爲人也, 犀額刀眉, 綠瞳而白耳. 擇孤高而愈親, 望繁華而愈疎. 故寡合而常貧.)”

 

넓은 이마에 날카로운 눈썹은 시원스럽되 타협하지 않는 불같은 성정을 보여준다. 초록 기운을 띤 눈동자에 유난히 흰 귀가 백대 이전의 사람과 흉금을 트고, 만리를 넘놀던 높은 뜻과 닮았다. 그 눈으로 구름과 안개의 기이한 자태를 관찰했고, 그 귀로 온갖 새의 신기한 소리를 들었다. 그는 글의 끝에다 이렇게 썼다. “아! 형체만 남기고 가 버리는 것은 정신이요, 뼈는 썩어도 남는 것은 마음이다. 이 말의 뜻을 아는 자는 생사와 이름의 밖에서 그 사람과 만나게 되리라.(嗟乎! 形留而往者神也, 骨朽而存者心也. 知其言者, 庶幾其人於生死姓名之外矣.)”

 

진작에 북경에서 사귄 화가 나빙(羅聘)이 그린 군관 복장의 박제가 초상화가 남아 있다. 초상화 옆면에 쓴 시에서 나빙은 “이제부턴 멋진 선비 보더라도 냉담하리. 이별 정에 마음이 너무도 슬퍼지니.(從今冷淡看佳士, 唯有離情最愴神.)”라고 썼다. 너처럼 멋진 사람을 다시 보게 되더라도, 장차 작별의 슬픔을 생각하면 앞으로는 절대로 정을 주지 않겠다고 한 말이니, 박제가를 향한 깊은 정이 뭉클하다.

 

이번 남양주 실학박물관에서 ‘실학청연(實學淸緣)’을 주제로 8월 22일까지 열리는 기획 전시에 이동원 화가가 그린 박제가의 관복 입은 대작 초상화가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나빙이 그린 박제가의 얼굴에다 당하관의 신분을 반영하여 흉배에는 백한(白鷴)을 그렸다. 시원스러운 이마에 초록 눈동자를 담은 박제가의 초상화는 온 중국이 인정했으나, 살아 불우했고 죽어 슬펐던 그를 향한 진혼(鎭魂)의 느낌이 담겨 처연하다. 뼈는 썩었어도 그 마음과 정신이 그림으로 되살아난 느낌이다. 함께 걸린 형형한 눈빛의 연암 박지원의 새 초상화 또한 흐리멍덩하던 정신을 화들짝 돌아오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