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현진의 돈과 세상

[차현진의 돈과 세상] [21] 혈맹, 전맹, 물맹

bindol 2021. 5. 27. 05:28

[차현진의 돈과 세상] [21] 혈맹, 전맹, 물맹

차현진 한국은행 연구조정역

 

cha-hyunjin 기자페이지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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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위기가 터지자 모두가 죽음을 걱정했다. 그러나 곧 사는 문제, 즉 경제로 관심을 돌렸다. 전쟁도 마찬가지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직후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한국의 명운을 걱정했다. 하지만 1·4 후퇴가 시작되자 같은 신문은 “한국전쟁이 초래한 증세와 적자”를 톱기사로 다뤘다.

정작 한국은 재정 적자 걱정을 덜했다. 미국의 원조로 연명하고 있으니 혼자 고민해봤자 답이 안 나왔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는 회계연도를 미국과 일치시키고 원조금만 기다렸다. 당시 미국의 회계연도는 독립기념일에 맞춰 7월에 시작했다. 한국 정부의 회계연도를 1월에 시작하도록 바꾼 것은 원조가 줄어든 1957년이다.

당시 우리의 경제 현안은 재정 사정이 아니라 ‘돈’ 그 자체였다. 6월 27일 서울을 버리고 급하게 남하하면서 한국은행 지하 금고의 화폐를 포기했다. 그 돈이 북한군 수중에 들어가자 새 돈을 찍지 않을 수 없었다. 화폐 제작은 일본 대장성 인쇄국이 맡았다. 화폐 도안에서 제작, 수송까지 보름밖에 걸리지 않았다. 미 태평양사령부가 일본 인쇄국 직원들을 감금하고 밀어붙인 결과다. 인쇄비는 미국이 부담했다. 그러나 1953년 2월 한국 정부는 또다시 새 돈을 뿌렸다. 인플레이션에 따른 화폐개혁이었다. 그 돈은 미국 정부가 인쇄했고, 이번에도 인쇄비는 미국 몫이었다.

 

그때 한국은 미국에 ‘돈 먹는 하마’였다. 전쟁이 최고조였던 1952년 미국 정부가 한국에 뿌린 돈은 미국 명목GDP의 4.2%였다. 같은 기준으로 보면, 베트남(2.3%), 이라크(1.0%), 아프가니스탄(0.7%)에서 뿌린 것보다 많았다.

미국은 우리의 혈맹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에서 알링턴 국립묘지부터 들른 이유다. 미국은 전맹(錢盟)이기도 하다. 미 연준은 통화 스와프 계약을 통해 달러를 빌려주고, 한국은행은 미국 국채에 투자한다. 이제 백신과 반도체 같은 중요 물자를 서로 의지하는 물맹(物盟)으로 진화한다. 그 옛날 ‘돈 먹는 하마’가 믿음직한 파트너로 발전한 것은 우리의 긍지요, 미국의 보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