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나라 당(口-7)오묘할 현(玄-0)마루 종(宀-5)
일곱 제후왕의 반란은 景帝(경제)가 조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자신들의 영지를 거침없이 삭감함으로써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는 한편 자신들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정책을 편 데 대한 불만과 불안에서 비롯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전에 제후왕들이 독자적으로 재부를 쌓아가면서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여 독립국의 수준에 이르렀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자 빌미였다. 어쨌든 이를 ‘吳楚七國(오초칠국)의 난’이라 부른다. 처음에는 반군이 우세했으나, 곧 周亞夫(주아부)의 활약으로 반란은 진압되었다.
오왕은 창에 찔려 죽었고, 초왕과 교서왕, 조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교동왕과 치천왕, 제남왕도 죽고 그들의 封國(봉국)도 폐지되었다. 결국 반란을 일으켰던 제후왕들은 모두 죽고, 그 후손들도 왕위를 잇지 못했다. 이 모두 이익을 이로움으로 여기고 올바름을 이로움으로 여기지 않은 탓이었다. 경제가 비록 중앙집권을 위해 권모와 술수를 썼다고 하더라도 제후왕들은 삼가고 또 삼가야 했다. 빌미를 제공하는 순간, 벌을 받아 영지가 깎일 수밖에 없었다.
역사를 돌아보면, 올바름을 저버리고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쳐 자신과 나라를 위태롭게 만든 황제도 한둘이 아니다. 그 가운데서 唐玄宗(당현종)을 보자. 그는 즉위 전에 임치왕으로 내쫓겼다가 황후 위씨가 딸 안락공주와 결탁하여 중종을 독살하자 병사를 소집하여 궁중에 들어가 위씨와 안락공주를 죽이고 위씨 가문을 몰살했으며, 또 고모인 태평공주가 자신을 독살하려는 것을 피하고 태평공주와 그 일당도 몰살했다. 이렇게 간사한 자들이 득세하여 궁중 내에 음모와 술수가 횡행하던 시기에 잘 처신하여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현종은 처음부터 환관이나 친인척이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姚嵩(요숭), 한휴, 宋璟(송경), 張九齡(장구령), 소숭 등 능력이 출중한 인재를 등용하여 재상으로 삼고 어진 정치를 폈다. 또 조정을 정비하고 상벌을 엄정하게 시행했으며 민생을 안정시키는 정치에 힘썼다. 이리하여 국력이 다시 강성해져 태종의 ‘貞觀(정관)의 治(치)’에 버금가는 치세를 이룩했다. 이를 ‘開元(개원)의 치’라고 부른다.
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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