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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운의 漢字 이야기 – 조고각하(照顧脚下)

bindol 2021. 6. 26. 19:55

照(비칠 조). 顧(돌아볼 고). 脚(다리 각). 下(아래 하)
글자 그대로 해석(解釋)하면 비추고 돌아 본다. 다리 아래를 비춰본다.  “다리 아래를 비춰 보고 돌이켜 본다”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오늘도, 그리고 내일(來日)도 항상(恒常) 저 높은 이상(理想)을 향해, 어떤 목표(目標), 종착역(終着驛)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달려 나간다.

 

그러나 그 보다도 더 중요(重要)한 것은 내 발밑, 내 주변(周邊), 내가 처(處)한 작금(昨今)의 현실(現實)을 직시(直視) 하고, “다시 한번 뒤돌아 생각해 보라”는 뜻으로 「照顧脚下」를 해석(解釋)해 본다.

여기서 잠시(暫時) 단어를 분석(分析)해 보면 <각하> 라는 말은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 되어 쓰여 진다.

예전에는 대통령각하(大統領閣下) 이때의 각하는 閣下(집 각. 아래 하) 써서 고급(高級) 공무원(公務員)이나 신분(身分)이 높은 사람, 곧 자기는 높은 집 아래 있는 신분으로 윗 분의 경칭(敬稱)으로 사용 하였다.

법원(法院)에서도 소송(訴訟) 요건(要件)이 안 되면 받지 않고 물리 칠때는 却下(물리칠 각. 아래 하)라는 법원 용어(用語)로 사용(使用)된다.

 

脚下(다리 각. 아래 하)는 “다리 아래” 라는 뜻으로 현재(現在) 또는 지금(只今) 당장을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각광(脚光)을 받는다”  즉(卽) 다리 아래서 빛을 비춰 위로 뛰어나게 드러남을 표시(表示) 할 때 쓰는 용어로도 사용되어 진다.

 

이와 비슷한 용례(用例)로 陛下(섬돌 폐. 아래하)는 황제(皇帝)나 황후(皇后) 또는 태황태후(太皇太后)나 황태후(皇太后)에 대한 호칭으로 陛 섬돌 아래에 있는 신하(臣下)로 이용(利用)된 말이다

殿下(대궐 전. 아래하)는 왕(王)이나 왕비(王妃) 왕족(王族)을 높이는 말로 殿(대궐 전) 임금이 거처(居處)하는 전각(殿閣) 밑에 있는 있는 신하를 지칭(指稱)하여 자기(自己)를 낯추는 말로 사용했다.

「조고각하」란 말은 불교(佛敎)애서 유래(由來)한 용어이다.

중국(中國) 송나라(宋나라) 때 오조 법연이라는 선사(禪師)가 있었다. 법연이 세 명의 제자(弟子)와 밤길을 밝혀 산길을 내려오다 가랑잎 솟구치는 바람에 그만 등불이 꺼져버렸다.

사위(四圍)는 칠흑(漆黑) 같았고 발밑엔 천(千)길 낭떠러지요, 큰 짐승이 있던 시절(時節)이니 생사(生死)를 장담(壯談)할 수 없는 상황(狀況)이었다.

법연은 제자들의 수행(遂行)을 가늠할 겸(兼) 자신(自身)의 두려움도 떨칠 요량(料量)으로 “자 이제 어떻게 하여야 하느냐”라고 어둠 속에서 제자들에게 물었다.

첫 번째로 혜근이 그들이 처한 상황과 느낌을 말했다. 광란(狂亂)하듯 채색(彩色) 바람이 춤을 추니 앞이 온통 붉사옵니다 하였고,

두 번째 청원은 쇠 뱀이 옛길을 가로질러 가는 듯하옵니다 하며 뜻 모를 말만 늘어놓았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대답(對答)한 극근의 말이 걸작(傑作)이었다. 우선(優先)은 불을 비추어 발밑을 봐야 할 것입니다. 이른바 ‘조고각하(照顧 脚下)’의 현답(賢答)을 추려내는 순간(瞬間)이었을 것이다.

마지막 극근의 말, 얼마나 현실성 있고 의미심장한 말인가 .

또한 시대(時代)를 달리하여 수좌(首座)가 선사(先史)에게 “달마(達磨)가 서쪽(西쪽)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선사가 대답한다. “불을 비추어 네 발밑을 보라.” 수좌는 거창하게 구도(求道)의 근본(根本)을 물었지만, 대답은 지극히 소박(素朴)했다고 전한다.

우리들은 산사(山寺)에 가면 법당(法堂)이나 선방(禪房)앞에 신발을 벗어 놓는 댓돌 위에 「照顧脚下」라는 글귀(글句)가 걸려 있는 것을 자주 본다.

「조고 각하」란 말은 먼데를 보는 것도 좋지만 당장 내 앞에 아니면 자기의 처지(處地)를 한 벌 돌아 보란 뜻으로 자주 쓰임을 볼 수 있다.

특히 법당에 들어 갈 때 신발을 가지런히 놓는 것은 항상 마음 가짐을 정갈 하게 하고 나갈 때를 생각해 편히 갈수 있도록 마음을 수양(修養) 한다는 가르침 으로도 많이 사용된다.

언론을 통(通)해 가끔 유명(有名) 연예인(演藝人)이나 사회저명(社會著名) 인사(人士)의 죽음의 소식(消息)을 접(接)한다. 그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야구(野球) 해설위원(解說委員) 하일성씨의 죽음 또한 친구(親舊)로 부터의 배반(背反) 잠시집착(暫時執着)을 버리고 내 발 아래를, 살아온 길을, 일찍 한번 돌아 봤으면 하는 안타까운 생각뿐이다.

잠시(暫時) 하던 일을 멈추고 현재에 지금의 나, 내가 걸어 온길,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 왔는지, 나는 누구인가, 한번 돌아보는 여유를 가져 봅시다.

「자살(自殺)」이란 용어는 뒤집어서 말하면 「살자」이다.

이 한순간 잘못된 생각이 무서운 일을 저지르게 된다. 우리 다함께 내 발밑을 다시 한번 쳐다보고 그동안 내가 살아 온길 되 짚어 보고, 조고각하 선승(禪僧)들의 선답(善答)을 마음속에 늘 간직하고 건강하게 고종명(考終命)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