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자유 잃은 중국, 독재는 비판여론 탄압으로 시작됐다 [송재윤의 슬픈 중국]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13회> ◇ 독재의 시작은 비판여론 탄압, 그 끝은 체제 바꾸는 헌법 개정
독재의 알파는 비판여론의 탄압이다. 독재의 오메가는 헌법 개정이다. 독재자는 문인의 입을 틀어막는다. 시민의 대자보를 단죄한다. 진실을 파헤치는 언론기사를 범죄시한다. 실상을 드러내는 학술논문은 죄악시한다. 독재자는 반대를 반동(反動)으로, 비판을 반역(反逆)으로, 풍자를 신성모독으로 몰고 간다. 공포에 질려 모두가 입을 닫으면, 독재자는 헌법을 뜯어고쳐 국체(國體)를 바꾸려 든다. 독재의 합법화가 독재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1965년 11월 10일 돌연히 신예의 비평가 야오원위안(姚文元)의 긴 글이 상하이의 문회보(文滙報)에 게재됐다. 역사학자 우한(吳晗, 1909-1969)의 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이념적 독초(毒草)라 혹독하게 공격하는 일종의 문예비평이었다. 그 후 2주에 걸쳐 그 글은 저장성의 절강일보(浙江日報), 산둥성의 대중일보(大衆日報), 장쑤성의 신화(新華)일보, 푸젠성의 복건(福建)일보, 안후이성의 안휘(安徽)일보, 장시성의 강서(江西)일보 등에 전재(轉載)됐다. 심상찮은 이념전쟁의 조짐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18일 동안 수도 베이징에선 단 한 언론에도 그 글이 실리지 않고 있었다.
<무산계급 혁명파여, 대권을 장악하라! 1967년 포스터, Fairbank Center, Harvard University 전시>
◇ 베이징 시장 펑전, 마오 어록 인용하며"사상 다양해야" 저항
당시 베이징 시장은 중공중앙 정치국 상무위원 펑전(彭眞, 1902-1997)이었다. 펑전은 베이징의 모든 언론들에 그 글의 게재불가를 명했다. 전국이 벌겋게 물이 드는데, 베이징만 아슬아슬 사상의 해방구로 남아 있는 형국이었다. 펑진이 저항하자 상하이 시위원회는 야오원위안의 비평문을 단행본으로 출판해서 전국에 유포하려 했다. 11월 24일 상하이의 신화(新華)서점은 전국의 지점에 출판의사를 물었는데, 오로지 베이징의 신화서점만 답신을 미루다가 닷새 후인 11월 29일 못이긴 듯 동의서를 전송한다. 결국 11월 30일 인민일보의 ‘학술란’에 야오원위안의 문장이 실린다. 11월 28일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가 완강하게 저항하는 펑전을 직접 만나 야오원위안의 글을 신속히 게재하라 독촉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저우언라이는 펑전에게 이 사태의 배후가 마오임을 알렸다.
마오의 압력으로 야오원위안의 글을 인민일보에 전재하게 되었지만, 펑전의 저항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일단 그는 신문의 ‘학술란’에 지면을 할애해서 글의 게재 목적이 “학술”적임을 분명히 밝혔다. 아울러 “편집인의 견해”를 통해 그는 1957년 마오가 제창한 “백화제방”을 인용하며 사상의 다양성을 옹호했다. 마오의 압박에 저항하기 위해 마오 자신의 어록을 들이민 격이었다.
이후 인민일보는 한 달여에 걸쳐 좌·우파 논쟁의 포럼을 이어갔다. 펑전은 논쟁을 통해서 불합리한 이념공세를 물리치고 사상의 자유를 확대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 마오쩌둥, 속내 감추고 펑전의 보고서 ‘2월 제강’ 승인
1965년 2월 펑전은 무익한 논쟁을 종식하기 위해 “5인 소조(五人小組)” 회의를 수집한다. “5인 소조”는 1964년 7월 마오쩌둥의 명령에 따라 구성된 중공중앙의 특별조직으로 문예계의 정풍(整風) 및 학술 비판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조장은 펑전이었다. 부조장은 국무원 부총리이자 중앙선전부 부장 루딩이(陸定一, 1906-1996)였다. 나머지 세 명은 문예계의 거장 저우양(周揚, 1908-1989), 신화사 사장 겸 인민일보의 편집장 우렁시(吳冷西, 1919-2002), 문화부부부장 캉성(康生, 1898-1975)이었다.
그 중 1940년대부터 비밀정보 총책으로 활약한 캉성은 자타공인 마오쩌둥의 오른팔이었다. 캉성을 제외한 나머지 네 명은 문혁 발발 직후 잔학한 정치적 박해를 받아야만 했다. 문혁 기간 내내 캉성은 “4인방”과 더불어 극좌파의 지략가로 활약한다. “5인 소조”에 박아둔 심복 캉성을 통해서 마오는 실시간으로 그들의 은밀한 대화를 도청하듯 훤히 전해 듣고 있었다.
“5인 소조” 회의에서 펑전은 노골적으로 우한의 변호인을 자처하고 나섰다. 그는 “해서파관” 논쟁은 순수한 학술토론일 뿐이며, 우한과 펑더화이가 조직적으로 연계돼 있다는 주장은 사실무근이라 주장한다. 마오의 심복 캉성은 그 자리에서 아무런 반론도 제기하지 않는다.
다음날 루딩이는 선전부를 통해 그동안 전개된 조사보고서를 작성한다. 2월 5일 펑전은 세 차례에 걸쳐 수정한 보고서를 들고 중공중앙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보고한다.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등 중앙행정의 실권을 쥐고 있는 당권파(黨權派)들은 펑전의 보고서를 승인한다. 2월 7일 최종본이 우한의 고급 빌라에 체류하는 마오에 타전된다. 펑전의 보고서는 이후 “2월 제강(提綱)”이라 불린다.
바로 다음 날 펑전은, 루딩이, 강성, 우렁시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우한으로 가서 마오를 알현한다. 이미 중공중앙의 승인을 얻은 펑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마오에게 “2월 제강”의 내용을 전한다. 마오를 앞에 두고 펑은 “실사구시의 정신”을 강조하며 “진실 앞에서 만민이 평등하다”는 말한다. “마오쩌둥 사상”을 마오 자신에게 확인시켜 준 셈이다. 마오가 물었다. “우한이 당과 사회주의에 반대하는가? 또 우한은 펑더화이와 정치적으로 연결돼 있는가?” 펑전은 두 가지 점을 모두 부인한다.
그 짧은 접견에서 마오는 속내를 철저하게 감춘 채 별일 없다는 듯 “2월 제강”을 승인한다. 닷새 후 (1966.2.13.) 중공중앙은 “2월 제강”을 인쇄해서 기밀문서의 형식으로 당내에 배포한다. 그 문제의 “2월 제강”을 중공중앙의 당권파가 공식적으로 승인했음을 의미한다.
<1967년 6월 13일 홍색전보. “‘2월 제강’을 충실하게 집행하는 흑(黑)사령부를 철저히 분쇄하라!>
◇ 마오의 공격 “反공산당·反사회주의·反마오사상 三反분자 척결”
2개월 간 펑전은 학술논쟁을 용인하고 최소한의 사상적 다양성을 지키고자 발버둥 쳤다. 학술토론의 방어선은 그러나 곧 무너지고 만다. 이후 두 달 동안 마오는 당권파를 향한 이념공세를 이어간다. 마오의 지시에 따라 직접 행동에 나선 주인공은 바로 그의 아내 장칭(江靑, 1914-1991)이었다. 1966년 4월 10일 중공중앙은 린뱌오의 요청에 따라 장칭의 주재로 개최된 군부대의 “문학·예술 공작 좌담회의 기요(紀要)”를 반포한다. 이 문건에는 다음 구절이 삽입되었다.
“건국 이래 우리는 마오쩌둥 사상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반공산당, 반사회주의 세력의 독재 아래서 살아왔다!”
놀랍게도 마오쩌둥이 중공중앙의 당권파 모두를 “독재세력”으로 규정한 셈이었다. 최고영도자가 중공중앙을 독재의 기구라 단정했다. 그 근거는 고작 “마오쩌둥 사상”에 대한 반대였다.
돌이켜 보면, 야오원위안의 “해서파관” 비평은 마오가 깔아놓은 밑밥이었다. 그 밑밥을 먹기 위해 호수의 물고기들이 떼 지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제 마오는 촘촘하게 짜인 큰 그물을 던졌다. 펄떡거리던 물고기 떼가 일시에 그물에 걸려드는 순간이었다.
캉성의 일지에 따르면, 마오는 1965년 여름부터 치밀하게 그 모든 상황을 치밀하게 기획하고 있었다. 혁명의 시나리오에 따라 마오는 11월 초 호화열차를 타고 유유히 베이징을 떠나 남방으로 갔다. 이후 그는 항저우와 우한의 고급빌라에 머물면서 문혁의 불길을 당겼다. 1966년 7월 중순 우한의 장강(長江)에서 수영하는 장면을 연출한 후, 마오가 무려 8개월 만에 베이징에 복귀했을 때, 문혁의 불길은 이미 활화산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삼반분자 펑전” 홍위병 집회에서 비투(批鬪)당하는 펑전. 홍위병들이 펑전의 이름자에 비판의 의미로 X를 그어놓았다. 삼반이란 反공산당, 反사회주의, 反마오쩌둥사상을 의미한다.>
※필자 송재윤(51)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는 고려대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중국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의 건국 전후부터 1960년대까지 근대사를 서술한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까치)를 최근 출간했다. 중국 근현대사 저작을 3부작으로 구상 중이며 이번에 연재하는 ‘문화혁명 이야기’는 2권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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