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시민의 자발적 저항이란 탈을 쓴 국가 주도 캠페인 [송재윤의 슬픈 중국]

bindol 2021. 7. 8. 06:29

시민의 자발적 저항이란 탈을 쓴 국가 주도 캠페인 [송재윤의 슬픈 중국]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이야기 <15회> ◇ 중공 “문화혁명은 마오쩌둥이 일으킨 것” 훗날 실토 표면상 문화혁명은 마오쩌둥을 보위하는 혁명군중의 자발적인 대중운동(mass movement)이었다. 대중운동이란 정부에 맞서는 자발적 시민의 저항을 이른다. 과연 문화혁명이 대중운동일까? 정부가 인민을 동원했다면 국가주도의 관판(官辦) 캠페인에 불과하다. 1981년 중공중앙의 결정문에는 다음 문구가 나온다. “1966년 5월부터 1976년 10월까지 문화혁명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이후 당, 정부, 인민이 겪었던 가장 극심한 후퇴와 과도한 상실을 초래했다. 문화혁명은 마오쩌둥 동지가 일으키고 이끌었다.” 중공중앙이 문화혁명을 “마오를 위한, 마오에 의한, 마오의” 캠페인으로 규정하는 대목이다. 벨기에 출신 작가 피에르 릭만스(Pierre Ryckmans, 1935-2014)는 1970-80년대 마오주의 문화혁명을 흠모하는 서구의 좌익 인텔리들을 비판하면서 일갈한바 있다. “문화혁명은 대중운동이라는 허구의 연막 속에서 치러진 권력투쟁일 뿐이었다.” 여전히 큰 의문이 남는다. 마오쩌둥은 과연 어떻게 그 수많은 군중을 움직여 “천하대란”을 일으킬 수 있었을까? 행정의 실권에 상실한 최고영도자 마오는 과연 어떻게 “혁명적 군중”을 움직일 수 있었나? 왜 다른 지도자들은 마오처럼 대중의 정신세계를 지배할 수 없었나? 1960년대 중반 중국의 인구는 7억 5천만 명에 달했다. 그 거대한 대륙을 일순간 혁명의 도가니에 몰아넣은 마오의 권력은 군중을 움직일 수 있는 그의 초인적 카리스마에서 나왔다. 물론 마오의 인격숭배는 정치적 선전선동의 결과다. 1940년대 초반부터 중국공산당은 마오를 구심 삼아 전일적 대중지배의 기술을 계발해 왔다. 그렇다 해도 대중이 그토록 마오를 추종하고 숭배한 까닭은 무엇일까?

<문혁 당시 마오쩌둥 인격숭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포스터. “위대한 스승 마오주석에 대해선 마음에 ”충(忠)“자를 품고, 위대한 마오쩌둥 사상에 대해선 격하게 ”용(用)“자를 꼭 붙들고!“

◇ 마오의 '몽상'에 대중 열광…포퓰리즘의 나락으로 마오의 카리스마는 그의 "거대한 몽상(夢想)"에서 나왔다. 그는 과격한 유토피아의 꿈을 꾸고, 대중에게 그 꿈을 실현하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대약진 운동 당시 인민공사를 추진해 인류사 최악의 대기근을 초래했건만, 마오는 코뮌의 구상을 전혀 포기하지 않았다. 1966년 5월 7일 국방장관 린뱌오에 보낸 서신에서 그는 인민공사 대신 "커다란 학교(大學校)"의 발상을 들고 나왔다. "린뱌오 동지, 세계대전이 없는 조건 하에서 군대는 '커다란 학교'(大學校)가 되어야 한다.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 이 커다란 학교는 전쟁 이외에도 다른 많은 일을 할 수가 있다. 정치를 배우고, 군사를 배우고, 문화를 배울 수 있다. 농업 및 부업에 종사할 수 있다. 중소 규모의 공장을 세워 필요한 산품(産品)을 만들 수 있다. 또한 자산계급을 비판하는 문화혁명에 수시로 참가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군학(軍學), 군농(軍農), 군공(軍工), 군민(軍民)이 모두 결합될 수 있다."

<“마오주석 “5.7지시”의 광휘어린 대도를 따라 용맹스럽게 전진하세!“

이 서신은 문화혁명의 정신을 담은 이른바 “5.7지시”로 널리 유포됐다. 이 문건에서 마오는 1) 사회분업의 철폐, 2)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차별 철폐, 3) 상품교환이 소멸된 자급자족의 자연경제를 지향했다. 나아가 당과 정부의 통합, 의회와 행정의 합일, 삼권의 통합을 주장했다. 심지어는 상비군 대신 각 단위의 인민의 자위적 무장을 제시하며, 지방자치의 실현까지 부르짖고 나왔다. 직종별 분업도 없고 지역적 특화도 없는 자급자족의 공산사회의 기본단위를 조급히 달성하려는 야심적 기획이었다. 대약진의 인민공사엔 공(工), 농(農), 상(商) 학(學), 병(兵)의 다섯 직종이 공존했는데, “커다란 학교”의 구상에선 상(商)까지 배제한다.

상품경제와 화폐제도까지 부정하는 공산근본주의자의 몽상이 아닐 수 없었다. 좌우를 떠나 근대국가의 경제 상식을 전혀 모르는 과격한 무식자(ignoramus)의 궤변이었다. 대기근의 참상을 빚은 마오는 더 과격한 유토피아의 망념을 대중 앞에 제시한 셈이다.

그럼에도 "혁명군중"은 그의 몽상에 열광했다. 그들은 밤낮으로 마오쩌둥 어록을 읽고, 마오가 성취한 중국혁명의 위대함에 감동받고, 마오가 제시하는 이상적 비전에 도취했다. 마오의 가르침대로 그들은 공산주의적 인간형으로 거듭 나려 노력하는 "순수하고 우직한" 혁명분자들이었다. 물론 그들의 순수와 우직 속엔 잔악한 폭력이 내포돼 있었다. 요컨대 1960년대 중반 중국인들의 정신세계는 마오쩌둥 사상이 쉽게 발아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土壤)이었다. 홍위병의 열정이 마오의 몽상과 공명했던 셈이다. 포퓰리즘의 꿈은 언제나 달콤하다. 대중은 그 꿈에 현혹당하고 만다. 문화혁명은 결국 포퓰리즘의 나락이었다.

 

<“마오쩌둥 사상의 위대한 홍기를 높이 들고 우리의 군대를 마오쩌둥 사상의 커다란 학교로 만들자!” “우리는 반드시 마오쩌둥의 지시를 따라 잘 싸우는 군대가 됨과 동시에 잘 공작하는 부대, 생산하는 부대가 되어야 한다. 군학(軍學), 군농(軍農), 군공(軍工), 군민(軍民)을 모두 아우르는 마오쩌둥 사상의 대학교를 만들자! 문무(文武)와 공농(工農)을 겸하는 공산주의 신인을 배양하자!”

◇ 문혁의 도화선, 최초의 마르크시스트 대자보 1966년 5월은 천하대란의 시작이었다. 5월 7일 마오는 린뱌오에 보낸 서신에서 "커다란 학교"의 구상을 제시한다. 중공중앙은 5월 10일 베이징 시위원회의 인원을 전격 교체한다. 곧이어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5.16통지"를 채택한다. 이로써 문혁의 기본정신은 이미 분명하게 공표됐다. 마오는 지난 6-7개월 간 당·정·군의 반혁명분자들을 송두리째 잡아들이는 촘촘한 그물을 짜고 있었다. 역사학자 우한(吳晗, 1909-1969)의 "해서파관"을 공격해 베이징 시장 펑전(彭眞, 1902-1997)을 무릎 꿇렸다. 군부의 장악을 위해 대원수 뤄루이칭(羅瑞卿, 1906-1978)을 숙청하고, 중앙선전부의 루딩이(陸定一, 1906-1996)와 중난하이의 정보통 양상쿤(楊尙昆, 1907-1998)도 몰아냈다. 이제 열광적인 대중의 호응이 절실한 시점이었다. 1966년 5월 25일 베이징 대학 식당의 벽에 붙은 1400자 정도의 비교적 짧은 대자보가 나붙는다. 베이징대학 철학과 당서기 녜위안쯔(聶元梓, 1921-2019) 등 7인은 총장, 대학부 부부장, 베이징대 당위원회 부서기 등을 "마오쩌둥 사상에 반대하는 수정주의자"들이라 비난하고 모독한다. 이 대자보에 대해 기다렸다는 듯 마오는 "파리코뮌의 선언"이라 극찬하고, 신문과 방송은 뒤따라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대자보"라 선전한다. 그 결과 이 짧은 대자보는 문혁의 도화선이 되는데….

<1966년 6월 5일자 "인민일보"는 1면에 최초의 대자보 이후 베이징 대학에서 일어난 문화혁명의 움직임을 대서특필하고 있다. "마오주석과 당중앙의 위대한 호소에 따라 베이징 대학에서 압박당하던 무산계급 혁명파가 일어났다! 그들은 총장 루핑을 영수로 하는 자산계급 보황파(保皇派)의 통치를 뒤엎는다! 그들은 자본주의를 복원하려는 음모를 분쇄하는 투쟁에서 승리를 이어가고 있다. 자산계급 보황파는 광대한 군중에 포위되어 있다!">

그 내용을 뜯어보면 공허하다. 대자보는 "전국에 장렬하게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는 이때, 베이징대는 군을 믿고 미동도 없이 냉담하게 싸늘하기만 기운만 감돈다"며, "수많은 교수와 학생들의 혁명적 요구를 압제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아울러 "학교의 당 조직이 지도력을 강화해 맡은 바 직무를 고수해야 한다"는 대학본부의 지시를 반혁명적이라 공격한다. 결국 중공중앙의 516통보를 지지하면서 펑전의 퇴위를 정당하다고 하는 선언이다. 마지막으로 "일체의 혁명적 지식분자들이여, 전투의 시기가 왔도다!"란 절규와 함께 유명한 세 구절의 구호로 끝을 맺는다. "당 중앙을 보위하라! 마오쩌둥 사상을 보위하라! 무산계급독재를 보위하라!" 대자보의 대표 집필자로 알려진 녜위안쯔는 문혁기간 제5인자의 지위에 올라 혁명투사로서의 경력을 쌓지만, 1978년 4월 투옥되어 1983년 반혁명행위와 모욕죄 등으로 17년 형을 언도 받고 1986년 가석방된다. 녜위안쯔는 이후 회고록에서 이 대자보의 작성에 외부의 간섭은 전혀 없었다고 항변했지만, 다수 연구에 따르면 이 문제의 대자보는 치밀하게 기획된 문혁의 불쏘시개였다.

<1966년 6월 5일자 "인민일보"는 1면에 최초의 대자보 이후 베이징 대학에서 일어난 문화혁명의 움직임을 대서특필하고 있다. "마오주석과 당중앙의 위대한 호소에 따라 베이징 대학에서 압박당하던 무산계급 혁명파가 일어났다! 그들은 총장 루핑을 영수로 하는 자산계급 보황파(保皇派)의 통치를 뒤엎는다! 그들은 자본주의를 복원하려는 음모를 분쇄하는 투쟁에서 승리를 이어가고 있다. 자산계급 보황파는 광대한 군중에 포위되어 있다!">

※ 필자 송재윤(51)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는 최근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까치)를 출간했다. 중국 최현대사를 다룬 3부작 “슬픈 중국” 시리즈의 제 1권이다. 이번에 연재하는 ‘문화혁명 이야기’는 2권에 해당한다. 송 교수는 학술 서적 외에 국적과 개인의 정체성을 다룬 영문소설 “Yoshiko’s Flags” (Quattro Books, 2018)의 저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