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에 기생하는 어용 지식인, 사냥개의 운명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45회>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문혁 초기의 비판투쟁(批判鬪爭)) 장면/ 공공부분>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45회>
인텔리겐치아는 권력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 모습이 백열등에 몸을 부딪치며 날개를 퍼덕이는 부나방을 닮았다. 권력을 동경하는 지식인의 정치적 야망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 세계사의 모든 거대한 혁명은 지식인의 정치적 상상력이 정치권력과 결합될 때 비로소 완성됐다. 군사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할 수 있지만, “아름다운 꿈”을 팔아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 한다면 정치혁명이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자나 맹자처럼 모든 시대의 지식인들은 권력자를 향해 치국(治國)의 요체와 경세(經世)의 묘책을 외쳐댄다. 문제는 지식인이 권력자에 아부하고 기생할 때 발생한다.
진시황 도와 천하통일 이룬 이사(李斯)의 최후
가령 고대 중국에서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진시황(秦始皇, 재위 221-210 BC)의 뒤에는 순경(荀卿, 3세기 BC, 순자)의 문하에서 치국(治國)의 책략을 탐구했던 초(楚)나라 하급관리 이사(李斯, 280-208 BC)가 있었다. 어느 날 곡간에서 배불리 지내는 쥐들을 본 후, 이사는 자신이 굶주린 뒷간 바닥의 쥐와 비슷하다 생각했다. 이후 그는 권력의 곡간을 찾아 진나라로 옮겨갔고, 법가의 치술을 팔아서 권력의 핵으로 들어갔다.
이사의 꿈은 지방 군웅의 침략전쟁을 종식하고 영구평화의 기반을 닦는 중앙집권적 군현제와 사상통일의 실현이었다. 바로 그 꿈으로 이사는 진시황을 사로잡았고, 법가의 천하통일을 달성했지만······. 황제가 죽자 이내 환관 조고(趙高)의 계략에 빠져 일신을 망치고 말았다. 기원전 208년 여름, 이사는 이마에 문신 새김을 당하고, 코를 베이고, 다리를 잘린 후, 광장의 군중 앞에서 허리를 절단하는 요참(腰斬)을 당했다. 그의 삼족(三族)도 모두 도륙(屠戮) 당했다.
<진시황의 목숨을 노렸던 자객 형가(荊軻)의 이야기를 묘사한 동한(東漢)의 부조. 형가(왼쪽)가 던진 단도가 기둥에 박혀 있다. 오른쪽의 진시황은 옥쇠를 들고 있고, 맨 왼쪽의 병사가 진시황을 구하기 위해 달려가고 있다./ 공공부문>
마오 “진시황은 고작 유생 460명 묻었을 뿐이잖아”
마오쩌둥은 역사의 악인으로 인식돼온 진시황의 재평가를 시도했다. 1958년 중국공산당 제8기 전국대표대회 2차 회의에서 마오쩌둥이 직접 청중 앞에서 말했다고 전해진다.
“진시황이 뭘 했다고. 고작 460명 유생들을 매장했을 뿐이잖아. 우리는 4만6천명의 유생을 묻었잖아. 우리가 진반(鎭反)운동을 할 때 반혁명분자들을 제거했잖아. 너희 지식분자들은 우리를 진시황이라고 비난을 하는데, 틀렸어. 우리가 진시황을 100배는 넘어섰지.”
문화혁명 당시 관방 학자들은 진시황의 법가주의 혁명을 칭송했다. 홍위병들이 공자의 고향에 달려가 공묘의 문물을 파괴하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유가는 봉건지주계급의 이념이라 폄하됐다. 반면 법가는 대일통(大一統)의 중앙집권적 제국을 구축한 진보사상이라 칭송됐다.
마오쩌둥은 분명 진시황의 권위를 넘어 중국 역사상 최고의 영웅으로 역사에 기록되길 원했다. 1936년 연안의 토굴에서 마오쩌둥이 직접 지었다는 운문 “심원춘·설(沁园春·雪)”에는 진시황에 대한 그의 평가가 단적으로 드러난다. 바로 “진시황과 한무제는 아쉽게도 문채가 부족했네! (惜秦皇汉武,略输文采)”라는 구절이다. 혁명의 관점에서 문채(문학적 풍류)는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선전선동의 기술을 말한다.
진시황이 “위대한 법가혁명”을 멋지게 꾸밀 수 있는 혁명의 이론을 갖추지 못했었다는 지적이다. 진시황은 천하통일을 달성했지만, 후대의 중화제국은 모두 법가대신 유가를 국가이념으로 삼았다. 법가가 이룬 천하통일의 혁명이 유가에 의해 하이재킹(hijacking) 당했다고 볼 수도 있다. 마오쩌둥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정교한 이론의 계발이 없인 공산혁명이 성공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마오주석님, 만세, 만만세!” 마오쩌둥은 실제적인 황제로서 늘 진시황에 비견됐다./ 공공부문>
이념전선의 전위부대, 마오 선집 편찬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마오쩌둥은 집권초기부터 권력을 바라고 구름처럼 모여든 수많은 인텔리들 중에서 발군의 인재를 선별해서 이념전선의 전위부대를 조직했다. 이들 개개인의 이력을 추적해 보면 대부분 영웅을 꿈꾸며 일찍이 공산혁명에 투신한 권력지향의 인물들이었다.
예컨대 마오쩌둥의 최측근 톈자잉(田家英, 1922-1966)은 조실부모(早失父母)한 후 독학으로 문장을 읽혀 불과 13세에 문예지에 수십 편의 시가(詩歌)를 출판했던 쓰촨(四川)성의 문학 신동(神童)이었다. 그는 1938년 공산당에 입당한 후, 중앙선전부 등에 배속되어 곧 문재를 드러냈다. 1948년 이래 그는 마오쩌둥의 비서로 근무했다. 그는 훌륭한 문장력을 발휘해서 헌법 제정에도 참여했으며, 마오쩌둥의 시사(詩詞) 작품을 손질하고, 연설문의 초안을 작성했다.
승승장구하던 톈자잉은 1960년대 초반 후난성 답사 후, 기근의 실태에 관해 보고서를 올리면서 마오의 눈 밖에 났다. 문혁이 개시되던 1966년 5월 22일 오전, 우경분자로 몰렸던 톈자잉은 스스로 목을 맸다. 그에게 들씌워진 죄목 중엔 “마오쩌둥 저작”의 조작 혐의가 섞여 있었다.
마오는 1950년부터 20대의 톈자잉을 “마오쩌둥 선집”의 편찬에 참여시켰다. “마오쩌둥 선집 편찬”은 마오가 이념의 전위부대에 맡긴 최초의 임무였다.
<마오쩌둥과 그의 비서 톈자잉의 모습. 마오쩌둥은 쓰촨성의 신동 톈자잉을 발탁해서 비서로 삼았지만, 이후 텐자잉의 직언이 이어지자 정치적 박해를 가했다. 텐자잉은 문혁이 공식적으로 시작되는 1966년 5월 22일 자살한다./ 공공부문>
스탈린 “마오쩌둥은 동굴의 마르크시스트”
1949년 12월 말 난생처음 소련을 방문해 2개월 간 체류했던 마오쩌둥은 스탈린에 “마오쩌둥 선집”의 편찬 계획을 알렸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동굴의 마르크시스트라 조롱했다. 마오쩌둥은 게릴라 전사의 이미지를 벗고 공산주의 이론가의 반열에 편입되길 갈망했다. 마오는 스탈린에게 중국공산당은 무장투쟁에 몰두한 결과 이론적 무장이 부족하다 실토한 후, 소련의 이론적 자문을 부탁했다. 스탈린은 소련 공산당의 대표적인 철학자 파베 유딘(Pave Yudin, 1899-1968)을 주중대사로 파견했다. 유딘은 1953년 12월 3일부터 1959년 10월 15일까지 베이징에 머물면서 중국의 학자들을 이론적으로 지도했다.
1950년 시작된 “마오쩌둥 선집” 편찬 작업은 한국전쟁 때문에 일시 중단되었다가 1.4후퇴로 유엔군이 38선 이남으로 내려간 후, 1951년 2월 말부터 정식으로 재개됐다. “마오쩌둥 선집” 편찬의 총책임자는 다름 아닌 류샤오치였다. 류샤오치는 중공의 일대표적 이론가이자 문필가였던 천보다(陳伯達, 1904-1989)를 편집장으로 임명했고,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후차오무(胡喬木, 1912-1992)와 톈자잉에 편집의 실무를 맡겼다. 26개 언어로 번역된 “마오쩌둥 선집”의 발간 총수는 3억 부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1950년대 출간된 마오쩌둥 선집의 영역본. / 공공부분>
중공 기관지 ‘홍기(紅旗)’ 논객들의 몰락
“마오쩌둥 선집”을 출간한 후, 마오쩌둥은 한층 더 혁명의 이론화에 박차를 가했다. 1958년 6월 1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마오쩌둥의 제의에 따라 <<홍기>>지를 창간했다. <<홍기>>지는 1988년 6월 16일 <<구시(求是)>>로 개명될 때가지 30년 간 매달 2회씩 출간된 대표적인 중공의 이론지였다. 국내외 주요 현안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공식입장은 거의 대부분 <<홍기>>지의 사론(社論=사설)을 통해서 발표됐다. 마오쩌둥이 직접 권두언을 쓰는 경우도 적잖았다.
그만큼 절대의 권위를 가졌기에 <<홍기>>지의 편집위원들은 드라마틱한 정치적 영욕(榮辱)을 겪게 되었다. 1958년부터 1970년까지 <<홍기>>지의 발행을 주관했던 천보다는 결국 반혁명분자의 오명을 쓰고 숙청됐다. 지난 회(44회)에서 조명했던 문혁의 “3대 필간자” 왕리, 관펑, 치번위가 바로 <<홍기>>의 대표 논객들이었다. 마오쩌둥은 세 사람이 글을 지어 발표할 때마다 적극 지지를 표했다. 마오의 승인을 얻는 세 사람의 평론은 한 편 한 편 혁명군중을 격동시키는 문혁의 불길이 됐다.
절대권력자의 비호 아래서 펜대를 놀려대던 세 사람은 1968년 1월 재판의 절차도 없이 친청(秦城) 감옥에 수감됐다. 왕리와 관펑은 1982년에 석방됐지만, 치번위는 1980년 옥중에서 체포되는 형식을 거쳐 1983년 18년 형을 선고받은 후 1986년에야 18년의 수형 생활을 마치고 만기 출소했다.
<문혁 초기 권력의 핵심에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치번위, 왕리, 관펑의 모습/ 공공부문>
이사는 독특한 법가사상으로 진시황을 지배했다. 비록 그의 몸은 비참하게 찢겼지만, 그가 고안한 통일정책은 2천년 중화제국의 기틀이 되었다. 반면 왕·관·치는 마오쩌둥에 이용만 당했던 꼭두각시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설파한 게 아니라 마오쩌둥 사상만을 선전했던 허깨비 지식분자였다.
독창적인 사상으로 권력자를 사로잡은 인텔리는 정부의 실권을 장악할 수도 있다. 반면 권력자에 기생하는 인텔리는 헐떡이며 토끼를 잡아와선 삶기고 마는 사냥개와 다르지 않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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