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전문가 아니면 타도...지식분자는 인간 아닌 소·뱀 귀신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1967년 4월 27일 반혁명수정주의 분자들에 대한 비판투쟁의 한 장면/ 李振盛, “紅色新聞兵”, 169쪽>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53회>
1949년 이래 중국현대사는 지식인 수난의 역사였다. 사회주의 혁명의 이름 아래 사상, 언론, 양심의 자유는 억압되고, 학술 탐구의 중립성은 철저하게 훼손됐다. 1950년대 이래 숙청된 지식인들 중에는 작가, 언론인, 철학자, 문학비평가, 역사학자 등 인문계열의 인텔리들뿐만 아니라 물리학자, 화학자, 생물학자, 석유화학자 등 자연과학자와 전문기술자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1950년대부터 마오는 “붉고도 전문적인”(又紅又專) 인물의 배양을 요구했다. 양자를 똑같이 중시한 듯하지만, 실제로는 과학적 전문성보다 이념적 선명성이 더 중시됐다. 문화혁명의 개시와 더불어 중국의 모든 과학자들은 다시 한 번 철저한 사상검증의 늪을 헤쳐가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전문가들이 수모를 겪고 목숨을 잃었다. 특히 1968년 봄부터 청계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지식인들은 집중적인 공격의 대상이 됐다. 몇 가지 사례만 일단 짚어보자.
과학기술 전문가들의 죽음
1968년 5월 청계 운동이 개시된 직후, 중국의 최고명문 칭화 대학(淸華大學)의 6000명 교직원 중에서 1228명이 조사를 받았다. 그중 16명이 죽음에 내몰렸다. 칭화 대학과 쌍벽을 이루는 베이징 대학에선 전체 교직원의 22.5%에 달하는 900명이 조사를 받았고, 그 중 23명이 비자연적 사망에 이르렀다. (楊繼繩, <<天地飜覆>>, 608)
중국과학원 창춘(長春) 광학정밀 기계연구소의 116명, 창춘 응용화학연구소 110명의 노장 과학자와 청년 기술인원이 특무(特務, 특수간첩)의 누명을 썼다. 안후이(安徽)성의 한 강철 설계원에선 978명의 직공 중에서 134명이 가혹한 심문을 당했는데, 대부분 최고의 전문가 및 권위자들이었다. 중국과학원 상하이 연구소에서도 600여명이 특수간첩으로 몰려서 200여명이 격리·심사를 받고 그 중에서 16명이 잔혹하게 살해되거나 자살에 내몰렸다. (楊繼繩, 같은 책, 609)
비극적 사례를 하나만 돌아보면, 중국과학원 다롄의 화학물리연구소 샤오광옌(蕭光琰, 1920-1968)은 일본에서 태어나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석유공학의 권위자였다. 1951년 신중국의 건설에 기여하겠다는 애국심을 품고 귀국했고, 이후 그는 석유공업 분야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중국의 석유화학 발전에 큰 기여를 했음에도 샤오광옌은 1950년대 내내 출신배경 때문에 정치 탄압을 피해갈 수 없었다. 급기야 1968년 10월 5일 그는 “우붕(牛棚, 아래 설명)”에 억류당하고 그의 집안은 초토화됐다. 두 달 후 12월 11일 아침 그는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사망했다. 당시 노동개조의 과정을 거쳐 가던 그의 부인은 그 소식을 듣고는 이틀 휴가를 내서 14세 딸과 함께 동반 자살했다. (白介夫, “我與蕭光琰的苦澀友誼,”<<炎黃春秋>>7기, 2005)
<1966년 추정 중국 문화혁명의 한 장면/ 공공부문>
“냄새 나는 9등급의 늙은 무리” 가두는 소 우리 ‘우붕(牛棚)’의 탄생
문혁 시절, 중국 각지의 학교, 관공서, 단체, 공장, 등지에는 반혁명 흑방(黑幇, 검은 무리)을 잡아와서 억류하고 감금(監禁)하는 간이 건물들이 음지의 독버섯처럼 생겨났다. 정부의 묵인 하에 공공연히 운영됐던 반관반민(半官半民)의 초법적 집단수용소였다. 사람들은 반혁명분자들이 잡혀 있는 그곳을 흔히 우붕(牛棚)이라 불렀다. 노동 개조를 담당한다는 의미로 노개(勞改, 노동개조) 대원(大院)이라 불리기도 했고, 검은 세력을 가둔 곳이란 의미로 흑방(黑幇) 대원이라 불리기도 했다. 우붕은 문자 그대로 ‘소 우리’라는 의미였다.
문혁 시절 우붕은 “우귀사신(牛鬼蛇神)”을 가두는 우리였다. 소 귀신, 뱀 귀신이라는 의미의 “우귀사신”은 문혁 시절 반혁명적 지식분자를 이르는 통칭이었다. “우귀사신”이란 표현은 당(唐, 618-907)나라 시인 두목(杜牧, 803-852)이 이하(李賀, 대략 790-816)의 환상적 시상(詩想)을 칭송하면서 처음으로 사용했다. 마오쩌둥은 1960년대 초부터 지식분자를 폄훼하기 위해서 “우귀사신”이란 용어를 자주 사용했다.
문혁이 막 개시되던 1966년 6월 1일자 인민일보 제1면에는 “모든 우귀사신을 소탕하라!”라는 제목의 사론(社論)이 실렸다. 당시 베이징의 언론을 장악한 천보다(陳伯達, 1904-1989)가 마오쩌둥의 의도를 반영해서 작성한 문혁의 포고문이었다.
<1966년 6월 1일자 <<인민일보>> 제1면 사론(社論), “우귀사신을 소탕하라!”>
이 사론에서 우귀사신은 “사상과 문화의 진영에 넓게 포진하고 있는 다수”의 “전문가, 학자, 권위자, 조사옹(祖師翁)”이라고 정의된다. 특정 학파 혹은 사상의 개창자를 뜻하는 조사옹은 문혁의 맥락에선 과학기술 분야의 최고 전문가, 사상문화계의 최고 권위자를 의미했다. 우귀사신은 각 분야의 지식인과 전문가들을 무너뜨리는 인격살해의 흉기와도 같았다.
문혁 당시 마오쩌둥은 지식분자들을 “취노구(臭老九)”라 불렀다. 냄새나는 늙은 9등급의 무리란 의미였다. 원(元)나라 때 몽고족 지배자 당시 중국의 백성들을 직종별로 10가지로 나눠서 서열을 매겼는데, 이때 유생은 9등급이었다. 8등급인 창기(娼妓) 다음, 10등급인 거지 바로 전이었다. 마오쩌둥은 바로 그 노구 앞에 악취가 난다는 의미의 “臭”자를 붙여서 지식분자들을 취노구라 불렀다. 마오쩌둥의 지식인 혐오증이 그대로 표출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소 우리에 갇힌 지식인들: 하오빈의 회고록
문혁 발발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베이징 대학 역사학과 하오빈(郝斌. 1934- ) 교수는 1966년부터 1969년까지 30개월 간 우붕에 억류돼 있었다. 2014년 기념비적인 그의 회고록 “흐르는 물이 어찌 시비를 씻을까?”가 타이완에서 출판됐다. 그의 증언 따르면, 지식인의 우붕 생활은 문혁 초기부터 시작됐다.
1966년 9월 27일 베이징 대학 역사학과의 교수 및 직원 23명은 캠퍼스에서 차를 타고 1시간 넘게 가야 하는 베이징 북구(北區) 창핑(昌平) 현의 타이핑좡(太平莊)에 끌려가서 “반공반독 (半工半讀)”의 미명 아래 강제노역과 사상개조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1967년 늦봄, 초여름부터는 녜위안쯔(聶元梓, 1921-2019)가 이끌던 베이징 대학의 “홍색권력기구”가 쇠락하면서 감시하던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흩어졌다. 그 결과 5-6개월에 걸쳐 뜻밖의 해빙기가 있었지만, 곧 청계 운동이 시작되자 그때부터는 상상을 절하는 최악의 인권유린이 자행되기 시작했다.
<문화혁명 당시 중국 전역에 나타난 초법적 억류 시설 “우붕”의 모습/ 공공부문>
우붕에 갇힌 지식인 포로들은 매일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숨 돌릴 겨를조차 없이 비판투쟁을 당하고, 강제노역에 시달린 후, 강압적인 사상개조의 과정을 거쳐 가야만 했다. 창의적인 지식 생산에 전념하던 학자들이 다른 모든 책을 다 박탈당했다. 그들은 오로지 마오쩌둥 어록만을 반복해 낭독하고 암송하는 강제학습의 고문을 당해야만 했다. 1969년 여름까지 하오빈은 30개월 동안 일말의 자유도 없는 가혹한 포로의 생활을 감내해야만 했다.
죽음의 의지조차 박탈당한 지옥: 지셴린의 회고록
베이징 대학 동방언어학과의 지셴린(季羨林, 1911-2009) 교수는 하오빈 교수와는 달리 문혁 초기의 광풍만큼은 피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머잖아 교내 당파싸움이 가열되면서 그 역시 문혁의 불길에 휩싸였다. 녜위안쯔가 이끄는 신베이다파(新北大派)에 맞서 지셰린 교수는 반대편의 징강산(井岡山)파에 가담했다. 그 결과 그는 정치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지셴린 교수는 정치와 무관하게 불교 및 인도의 고대신화를 탐구하던 저명한 학자였다. 수십 편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왕성한 학술활동을 해온 결과 문혁 당시 그는 학계의 권위자가 되어 있었다. 1935-1941년 독일의 괴팅겐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점도 그를 사상범으로 몰아가기에 충분했다. 외국 학위를 가진 학계의 권위자는 곧 “반동학술권위”의 멍에를 쓸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1998년 베이징에서 출판된 그의 회고록 <<우붕잡억(牛棚雜憶)>>은 특유의 해학적인 문체로 문혁 시기 그가 겪었던 갖은 인권유린의 실상을 까발린다. 이 기념비적인 회고록은 중국에서도 널리 읽혔으며, 이후 영역되어 전 세계에 알려졌다. 회고록의 간략한 내용만 전하면······.
1967년 겨울에서 1968년 봄까지 베이징 대학의 캠퍼스에선 날마다 비판 투쟁이 이어졌다. 비판투쟁에 시달리다 수십 가지 방법으로 날마다 자살을 계획하던 지 교수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려 하는데······. 때마침 들이닥친 홍위병들이 온 집안을 박살내는 과정을 목격하면서 죽음의 의지조차 박탈당해 버린다.
1968년 이른 봄부터 5월 3일까지 두 번째 고난이 시작됐다. 100명이 넘는 교직원들과 함께 지 교수는 타이핑좡으로 끌려갔다. 이미 만 쉰일곱 살 고령으로 날마다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지셴린 교수는 누적된 피로와 영양부족으로 사타구니 새가 퉁퉁 부어 걷지도 못하는 지경이 됐다. 결국 두 시간 기어서 찾아간 의무실의 의사는 그가 흑방(黑幇)이란 사실을 알고는 치료를 거부했다. 진통제 하나 받지 못한 채 그는 다시 왔던 길을 기어서 두 시간을 가야만 했다.
<문혁 시대 억류 시설 우붕의 경험을 기록한 “우붕잡억(牛棚雜憶)”의 저자 지셴린 (季羨林, 1911-2009) 교수의 모습/ 공공부문>
이어서 베이징 대학의 캠퍼스로 이송된 지 교수는 많은 흑방들과 함께 자신들이 몸소 들어가 갇히게 될 우붕을 지었다. 우붕이 다 건설된 후, 지 교수는 9개월에 걸쳐서 우붕에 억류당했다. 독충이 득실거리는 우붕에서 밤낮으로 흑방의 포로들을 감시하던 학생들은 악마성을 드러냈다. 그들은 날마다 “고통 최대화의 원칙”에 따라 새로운 방법으로 우붕의 포로들을 괴롭혔다. 우붕의 체험을 통해서 지 교수는 비로소 불교에서 말하는 팔열팔한(八熱八寒) 16개 지옥이 진정 무엇인지 알게 됐다고 회고한다. 그가 보기에 지옥이란 민초가 겪었던 고통스런 현실의 체험이 그대로 투영된 집체적 상상력의 산물이었다.
“마르크스가 이미 역사의 진리 밝혀...학문 탐구 무의미”
마오쩌둥은 왜 그토록 지식인들을 경계하고 혐오했을까? 마르크스 인식론에 따르면, 모든 주장, 모든 지식은 계급적 당파성을 갖는다. 이 전제에 입각하면, 불편부당한 가치중립의 진리탐구란 인정될 수 없다. 또한 마르크시즘은 계급투쟁의 변증법을 통해서 역사 발전의 전 과정을 완벽하게 다 밝혔다고 주장하는 독단적인 교리다. 이미 마르크스가 진리를 설파했기 때문에 후대 지식인들의 지적 탐구는 사실상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다. 요컨대 계급적 당파성과 역사적 합법칙성이 마르크시즘의 기본 전제다.
이 두 가지 전제를 받아들이는 순간, 지식인은 존립 근거를 상실하고 만다. 지식인의 역할은 고작 마르크시즘의 교리에 따라 계급투쟁의 실천을 행하는 일 밖에 없다. 또한 마르크스가 이미 역사의 진리를 밝혔기 때문에 더 이상의 진리 탐구는 무의미해진다. 마르크시즘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교만과 독선이야말로 20세기 공산당 정권이 예외 없이 참혹한 전체주의로 귀결된 까닭이었다. 문화혁명의 대참사는 마르크스의 치명적 자만과 마오의 조급증이 빚어낸 정치적 도박에서 비롯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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